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중반까지 좀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롤리타가 더 재미있네, 하고 심드렁한 생각마저 가졌다. 주인공이 어디가 불안정한지 자꾸 왔다갔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정신 사납게 구는 통에, 좀체 집중이 되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자기변명이 긴 걸까.

게르만이 어느 날 자신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계획하는데 초반에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점점 확실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게르만이 하려는 짓과 생각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는 초반에 지루함을 느꼈던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것 같다.

롤리타가 더 재미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본질을 보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두께는 롤리타에 비해 한참 얇지만 그래도 롤리타 만큼의, 아니 롤리타를 읽을 때보다 더한 스릴과 긴장을 선사한 책이었다.

게르만은 계속해서 범죄의 예술성, 아름다운 기교 등을 논하는데 범죄에 대해 어떤 변론도 해줄 수 없는 나는 그런 생각에 전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게르만이 저지른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이대로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서로 공존을 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게르만은 스스로 아주 완벽한 범죄를 꾸몄다고 생각을 하고 부인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상황이 매우 이상하게 꼬여가기 시작한다.

일단, 독자는 철저히 게르만의 시점에서 상황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이 완벽하게 똑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혹시 사실 두 사람은 그저 닮은 정도고 게르만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 착각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신문에 적힌 말을 보는 순간부터이다.

여기에서 나는 자연히 롤리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롤리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험버트처럼 게르만 또한 지독한 이기심과 안하무인으로 스스로가 만든 함정 속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 게르만이 범죄를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확신했던 것이, 자동차에서 발견된 무언가를 통해 철저하게 깨지는 순간, 나는 아찔한 충격과 함께 어째서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하는 당혹감에 빠졌다.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초중반까지는 게르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가 과연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하는 호기심에 집중해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게르만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그 장면을 지나고 독자가 게르만이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즈음에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결말이 덮칠 것이다.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슨 수를 써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 악당의 최후는 어긋나 버린 예술성과 함께 철저하게 버림받게 됨으로서 어떤 만족감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 멋진 베이지색 외투를 걸쳤고
우아한 모자를 조심스럽게 썼다.
마지막 한 획이 남았다.
노란 장갑.
"좋아. 몇 발짝 걸어보지.
어디 보자. 자네한테 다 잘 맞나?"
그가 나를 향해 걸었다.
손을 주머니에 찔렀다 뺐다 했다.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를 쫙 펴고 으스대며 멋쟁이 흉내를 냈다.
"다 됐지, 다 된 거지?"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어디 제대로 좀 보자…….
그래,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돌아서. 뒤태가 어떤지 보고 싶어……."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등에 총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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