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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를 먼저 봤고 그 후에 영화가 내가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해서 책을 보게 되었다. 영화가 재미있든 없든 원작을 찾아서 봤겠지만 어쨌든 영화 덕분에 원작에 대한 기대가 증폭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원작은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야, 같은.
확실히, 원작이 있는 작품들은 원작을 반드시 봐야한다.
영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분위기라던가 맛깔 나는 표현, 세세한 묘사 등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다. 영화만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뭐, 거의 대부분은 말이다.
영화를 볼 때는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승민이었고 수명이야…… 내게는 부차적인 인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과거는 꽤 인상 깊었지만 그렇다 할 정도로 충분히 깊게 다가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원작 속 수명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더, 역시 원작은 꼭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명이가 생각보다 훨씬 매력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나 책에서나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것은 역시 승민이었다.
능글맞게 웃는 표정 속에 어떤 상처가, 분노가, 절망이 감추어져 있을지 너무나 여실히 짐작 되어서 그가 보여주는 작은 행동마저 내 눈에 깊게 아로새겼다. 마치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승민이라는 인물 자체가 답답한 것은 아니었지만(애초에 한국에 돌아오지 말고 편지 한 장만 보내지……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처한 상황과 현실이 분통터져서 나중에는 승민이라는 이름만 봐도 먹먹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한 점은, 비록 이 시궁창 같은 곳일지라도, 자유가 억압되어 있다 하더라도 행복한 순간은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는 거였다. 반드시.
절망과 분노와 답답함으로 점철된 나날이지만 밝게 빛나는 순간은 분명 존재했다. 화내다가 슬퍼하다가 결국에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소중한 한순간이 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
그래서 빌어먹게 거지같지만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치고 올라왔다. 사실, 확률로 따지자면 2:8 비율이기는 하지만.
이런 유의 작품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건데 사람 하나 병신 만들기 참 쉽다는 거다. 우스울 정도로. 함정에 사로잡힌 스스로가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나 쉽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어이없고 억울해서 세상 어딘가로 비명을 지르고야 말겠지만, 승민이는 그 모든 감정을 한 데 모아 청춘에 바친다. 수명이는 그런 승민에게 점차 동화되어 간다. 너무나도 인간다운 이들이 청춘을 향해 가슴을 내밀고 유쾌하게 소리치는 장면이 떠올라서 나 또한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려야 마땅하지만 도리어 눈물이 터졌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에필로그도 여운이 남아 좋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수명이를 만나면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들이 청춘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 아주 잘 지켜봤다고.
뱃속으로부터 신경질적인 웃음이 솟구쳤다. 그것을 막지 않았다. 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웃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눈가로 비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발작하듯 웃어댔다. 추격자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승민이 따라 웃었다. 내가 왜 웃는줄도 모르면서 덩달아 웃었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두 개의 돌멩이처럼 보트 소리를 뚫고 날아가 건너편 화강암 절벽을 치고 수리호로 되돌아왔다. 하늘은 어두워져 가는 납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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