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골 생활 풍경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사실 나의 일상을,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을 서술해 보라고 한다면 그 방식에 있어 '서사'가 아닌 '묘사'를 택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을 서사적인 구조 속에 담아내기에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큼의 우여곡절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묘사를 한다고 해서 다채로울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비슷비슷한 하루하루가 지속되고 있을 뿐인걸. 아마 한 장면 써 보면 끝나지 싶다.
하지만 감히 묻는다. 과연 당신의 일상을, 당신의 일생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내러티브는 서사인가 묘사인가. 그리 다양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저런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더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아니 정말 나만 그런가?ㅎㅎ
그러나 소설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역시 어느 정도의 구조를 갖춘 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중심 인물을 설정하고─꼭 한 명이 아니어도 좋다. 몇 명의 중심인물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그를 중심으로 역시 중심을 잡아 굵직한 사건을 이어나가는 것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독자들을 소설 속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읽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또 다른 질문 하나. 그렇다면 한가로워 보이는 시골 생활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연작 소설집은 재미가 있을까요?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의 기준에, 다시 말해 서사적인 요소를 갖추었느냐의 기준에 따르자면 이 책은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한가로운 시골 생활 풍경 속 흔들리는 일상은 지역과 문화를 뛰어넘는 공감과 연륜있는 작가의 깊이있는 시선이 담겨 있다. 마냥 읽기에 재미가 없다고 그저 지나칠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시골 생활 풍경>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작품이다. 이스라엘 소설이라고? 뭐니뭐니해도 역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랜 갈등을 그려낼 수밖에 없겠군! 이라는 나의 예상은 책을 넘기자마자 박살이 나고 만다. 책의 시작과 함께 '그런 거 아니거든?'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그렇다, 그런 분쟁 지역의 특성 대신 <시골 생활 풍경>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도 전 개척자들에 의해 세워진 '텔일란'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그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연작 단편집이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그저 평화롭고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 단편에서 주인공으로 초점이 맞춰진 마을 주민 한 명은 또 다른 단편 속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이웃으로 등장한다. 별다른 일 없어 보였던 이웃들의 일상에 아모스 오즈는 돋보기를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가 갖다댄 돋보기 속 그들의 일상에는 균열과 흔들림이 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잠깐 들여다보자.
아내와 헤어지고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리에 젤니크 앞에 「상속자」의 권리에 손을 대려는 남자가 나타난다. 여의사 길리 스타이너 박사는「친척」인 조카 기드온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린다. 전직 국회의원이었으나 지금은 교사인 딸과 함께 말년을 보내는 노인 페사크 케뎀은 누군가가 「땅 파기」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 마을의 고옥을 사들여 새로운 건물로 지으려는 부동산 중개업자 요시 새슨은 독특한 구조의 고옥 안에서 「길을 잃(는)다」. 마을 면장 베니 아브니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씁쓸하게, 그리고 외롭게 「기다리기」로 한다. 17세 소년 코비 아즈라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마을 우체국장이자 도서관 사서인 서른 살의 이혼녀,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단 한 명의 여인을 발견한다. 십대 아들을 자살로 잃은 한 부부는 이웃들을 초대해 「노래하기」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른 시간,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낯선 이방인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이웃에 불과하기도 한 일곱 단편 속에 등장하는 '텔일란'의 주민들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모스 오즈는 그의 펜 끝에서 그들의 일상 속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함께 그려내고 있다.
그들을 지켜보는 나는 그 마을 속에서 벌어지는 일 모든 것에 함께 울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이 낯선 존재로부터 침범당하는 것에서 당혹감을 느꼈고, 처지는 다를지라도 언제나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존재의 부재에서 찾아오는 상실감에 오롯이 공감하기도 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면'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도 <시골 생활 풍경> 속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해보려 했고, 혹은 '도대체 이건 뭐 어쩌라는건가' 싶은, 작가의 메시지를 도무지 눈치챌 수 없는 이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을 전해보고도 싶다.
그렇게 조금은 이질감을 또는 동질감을 느끼며 아모스 오즈가 묘사하고 있는 <시골 생활 풍경>을 지켜봤다. 지역과 문화와 처한 상황 모두를 초월하는 '인간'의 실존을 담아낼 뿐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겠노라고 어렴풋이 말해 보련다. 도무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놓인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도, 또는 모든 것이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이나 단 하나의 공통요인을 통해 오롯이 공감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아모스 오즈의 내러티브는 그렇게 비슷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일상'과 어느 정도 통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책을 덮은 후의 여운이 잔잔하게 남았던 것은 아닐까.
덧1. '침묵하지 않는 작가' 아모스 오즈는 침묵하지 않고 작품과 실생활을 넘나들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의 말머리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단편 「땅 파기」 속에서는 전직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그 갈등을 직접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고, 그럼에도 '아버지와 딸'의 관계 속에서 지역과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덧2.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은 거다. 그런 거지 뭐:)
그 녀석이 여기에 온 이유는 아마 어떤 반환권을 주장하려는 것일 게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아니면 십자군 시절에 여기 살았을지도 모르는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 이름으로 땅과 집에 대한 권리를 차지하려는 음모일 거야._p.79, 「땅 파기」
그는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과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래서 그도 기념공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세 시간 전에 아내가 앉아 있다가 아델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아내를 기다렸다._p.165~166, 「기다리기」
혹시 상대방이 당신의 사랑에 보답해줄 거라는 희망 없이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있어요?_p.183, 「낯선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