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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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유치 야요미의 [후쿠야당 딸들]을 다시 읽었다. 450여년 동안 교토에서 제과점을 가업으로 삼았던 후쿠야 집안의 세 자매들의 성장담이 그려져 있는 이야기인데, 그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가족들과 자신을 맞춰가며 또 부딪쳐가며 부모가 된 그들은 자신이 아이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그랬듯 자식들을 대하고 있는 장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또 다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찾으며 성장해 가지만.


  그러니까, 그런 일은 계속 반복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당연히 지금 이 시점에서는 당시 부모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잔소리를 한 건지 이제는 이해를 할 수 있으니까. 자식이 아프면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라는 것이 부모 마음이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잘 되는 마음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 역시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역시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공감과 실천은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어쨌든 '공감'은 할 수 있으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어린 시절에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던 어른들의 한 마디를 어느새 나도 공감하고 있을 때. 분명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꼭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 줄거야' 하고 다짐을 하지만, 아 물론 이해를 못 해주기보다는, 그냥 어른들의 시선에 공감을 해 버리고야 만다. 나 역시 절대로 이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마 god를 안 좋아할 수는 없을거라고 다짐을 했지만, 지금은 역시 그 중학생 시절의 열정적인 마음을 그냥 어느 한 구석에 조용히 남겨두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8월에 다시 꺼내 들 준비는 마쳤다!ㅎㅎ)






  닐 게이먼의 [오솔길 끝 바다]는 이런 감상을 불러일으킬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위에 말한 것처럼 마냥 아름다운 감상만 흘러나오지는 않을테다. 오솔길 끝 바다로 나아가면,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의 다양한 감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오솔길 끝 바다]가 훌륭한 이유는 환상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그 다양한 감정들을 건드리는 요소를 자연스럽게 배치함으로써 책을 읽는 누구나 마음 속 어딘가를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임을 자신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가라앉았던 무언가를 건져냈을 때 그 형태가 다양한 빛을 낼 것이 틀림없음에 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소설 속 화자는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는 길에 문득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을 찾아가고 싶어 고향으로 운전대를 돌린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일곱살의 자신이 살고 있었던 집의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거기에 개축을 한 집마저 자신의 추억과 달리 집주인의 취향에 바뀌어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문득, 왜 지금까지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생생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 이 오솔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헴스톡 가의 농장이 있었고, 그곳을 돌아 나가면 레티 헴스톡이 말하곤 했던 '대양'이 있었다. 조그마한 연못처럼 보였는데, 레티는 그 대양을 건너 자신들은 먼 나라에서 건너왔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성장통의 시작은 호주에서 오팔을 채굴해 한탕을 노리던 남자가 '나'의 집(정확하게는 '나'의 부모님의 집)에 세입자로 들어온 뒤였다. 그 남자는 '나'의 소중한 새끼 고양이를 차에 치여 죽게 만들고는, 고양이를 소중히 묻어줄 틈도 없이 알아서 처리하고는 다른 고양이 '몬스터'를 데려와 이걸로 보상이 되었느냐고 물었다(물론 지금과 달리 동물에 대한 인식이 달랐기에 소년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의 아버지의 차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의 돈과 친구의 돈까지 모두 도박으로 날려버린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작은 마을에 찾아온 그 균열은 '나'와 레티 헴스턴과의 인연의 연결고리가 되었으나…….


  레티와 맞잡았던 손이 잠깐 떨어졌던 그 순간 이후, 둘 다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부모님 대신 '나'와 동생을 봐 줄 베이비시터 어슐러 몽턴은 '재앙'이 되어 찾아온다. 그녀는 '나'를 집 밖으로 나가 레티를 만나지 못하게 방에 가두어두었고, 아버지와의 외도를 목격하게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아버지의 심한 체벌을 겪게 한다. 그런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때는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닐 게이먼은 거기에 다른 세계의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소설 속 배경을 이색적으로 그림과 동시에 소년에게 찾아온 '흉기(?)'를 변주해 낸다.





  그렇게 일곱 살의 소년은 빠르게 성장한다. 빠르게 성장한 만큼 그 시절을 뒤돌아 볼 사이도 없이 잽싸게 잊곤 한다. 그러나 닐 게이먼은 그 망각 속의 추억을 '환상'을 통해 복원할 밑그림을 그려낸다. 그러나 역시 누구나 오솔길 끝 바다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언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자 나름의 변주곡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그것은 농장 뒤쪽에 있는, 오리가 사는 연못일 뿐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았다._p.9



어른들은 길을 따라간다. 아이들은 탐험한다. 어른들은 같은 길을 수백 수천 번 걸어가도 만족한다. 아미 어른들에게는 길을 벗어나고, 진달래 덤불 아래를 기어가고, 울타리 사이의 공간을 찾아낸다는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였고, 그것은 우리 집 대문 밖을 벗어나 오솔길로 들어갈 수 있는 서로 다른 방법을 십여 가지는 안다는 뜻이었다._p.95~96




우리는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어른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궁금했다. 그들은 모두, 사실은 어른의 몸에 싸인 어린이이들일까? 그림도 대화도 없는 지루하고 긴 어른 책들 사이에 숨겨진 어린이 책 같은?_p.185




나는 보통 아이었다. 그건 말하자면, 이기적이며 나를 제외한 다른 사물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확신했다. 바위처럼 단단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 나는 진짜 죽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파괴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모든 것이 파괴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_p.252~253




억울함이 번뜩였다. 그냥 사는 것만으로도, 세계에서 살아남고 세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 그렇게 그럭저럭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만으로도 힘들었다. 무슨 일을 했을 때 그 일이 누군가의 것을...... 죽지 않았다 쳐도, 그녀의 생명을 기꺼이 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힘들었다. 이건 공정하지 않았다._p.269




두 번째 달의 환영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지만, 한순간이었다. 곧 나는 그것을 마음속에서 털어버렸다. 아마 잔상이나 환영이었으리라. 잠시 동안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무엇인가의 환영. 너무나 강력해서 진짜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 잊힌 기억처럼 혹은 황혼 속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과거 속으로 희미해져버린 것._p.287







_20140728




*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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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량스푼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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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이든 계량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편리할까. 물론, 계량할 수 없어서 빛나는 수많은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계량할 수 있다면.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답정너'들과 '넌씨눈'이 등장하게 될까? 아니, 나의 애정은 이 정도인데 그걸 몰라준단말이야? 난 슬퍼, 이만큼 슬프다구. 그런데 왜 그걸 몰라줘. 응, 너 슬픈 것 같아. 그 슬픔을 줄여보는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때? 그건, 그 슬픔을 담는 동안 사용했던 '계량도구'를 가지고 다시 퍼내고 또 퍼내고, 또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보라구. 어차피 뭐든 계량할 수 있으니까.



  사실, 빈곤한 상상력은 무언가를 '계량'할 수 있음에서 그쳐버리고, 그 다음엔 뭘 해야할지 몰라 다시 상상의 나래를 고이 접어둔다. 아마 츠지무라 미즈키의 <나의 계량스푼>이 정말 무언가를 계량할 수 있는 스푼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작가의 상상력에 살짝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을텐데 뭐 할 수 없지.

 

 

 

  몰랐는데, 츠지무라 미즈키는 이런 식으로 SF와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경계를 아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이곤 하는 모양이다. [오더메이드 살인 클럽]만 읽어본 나로서는 아직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알 도리가 없었던지라 이번에 만난 [나의 계량스푼]은 작가의 상상력의 세계 속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아주 살짝만이지만.

 

 

 

  이 소설의 화자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다. 소위 말하는 '언령'으로 자신의 말로 상대방을 구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조건'과 '벌'을 함께 제시하면, 상대방은 '벌'을 피하기 위해 조건을 클리어하려 애쓴다는 식이다. 어머니의 다짐으로 사용하지 않던 능력이었지만, 소중한 친구 '후미'에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나'는 후미를 구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나'는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척 '아키야마 교수님'을 찾아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한다.

 

 

 

  '나'는 친구 '후미'를 구하기 위해 어떤 '조건'과 '벌'을 제시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포인트는 여기에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나'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령을 결정하기 전까지,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공부하다 보면 역시 조건제시게임에 걸맞은 논리가 펼쳐질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장편소설의 떡밥으로는 그다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내가 몰라서 그런 거 맞음..;;).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아키 선생님은 소년과 함께 계량할 수 없는 감정들을 계량하기 시작한다.

 

 

  사람의 악의는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의 악의에 맞서서 벌을 줄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 악의가 초래한 슬픔의 무게는 어떻게 상쇄할 수 있을까. 이를 상쇄하기 위한 타인의 애정은 어느 영역까지 공유를 할 수 있을까. 차근차근 '나'와 아키 선생님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마주칠 수 있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영리하고 순수한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지기에, '나'와 아키 선생님의 대화의 끝은 어떻게 이어질지, 그 '계량스푼의 속'을 들여다보고싶어지누나.

 

 

 

  그러나 역시 '계량스푼'으로 그 '계량스푼'을 계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의 결정으로 나에게 초래될 사건들은 어느 정도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하여 소년은 스푼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고, 이를 구해내는 것은 또 다른 스푼일 것이다. 토끼가 조롱조롱 매달려있는 계량스푼.

 

 

 

 

 

뱀다리. 그런데 츠지무라 미즈키... 너무 오글거립니다............... 아악 내 손발!! 오그라든 손발을 감당할 수는 있을 정도이지만, 게다가 [오더메이드 살인 클럽]은 나름 오글거릴 이유가 있지만, 아키 선생님 아무리 눈높이를 맞춰줬다 해도 .. Hㅏ... 선생님 대화 읽기 힘들어요...ㅠㅠ 다른 작품도 이렇게 오글거리면 어떡하지.

 

 

나는 평소 교육학부에서 장래에 학교나 유치원 선생님이 될 사람들을 상대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한번은 수업 과제로 이런 걸 낸 적이 있어요. 만약 아이에게 '왜 파리나 진드기는 죽여도 되는데 나비나 잠자리를 죽이는 것은 안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_p.195

 

복수한다는 것은 상대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과 상대의 인생을 엮을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복수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했어요._p.240~241

 

계량은 중요해요.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준비한 재료나 들인 수고가 전부 무용지물이 돼요. (…) 바른 도구를 사용해서 바르게 계량한다……. 이리 재고 저리 재가면서 과자를 부풀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리와 비슷해요._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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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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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을 때마다 늘 그렇지만, 그 때는 몰랐던 복선을 새삼스럽게 눈치챈다거나, 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소설 속 긴장감이나 분위기를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똑같은 책을 한 번 더 읽게 되더라도 그것은 같은 책이 아닌 게 될 것이다. 특히, 약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만나게 된 책은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간을 집어드는 대신 오래 전 읽었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리트는 내가 기억하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북구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는 진주 귀고리를 하고 머리를 천으로 감싼 채 살짝 벌어진 입술과 큰 눈을 뒤돌아보는 모습 속에 담아내고 있는데, 완벽하게 가려진 머리와 소녀가 서 있을법한 배경을 감춤으로써 소녀에 대한 정보를 감추어둔다. 모호한 표정만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추측을 할 수 밖에 없게 하는데, 거기에서부터 오는 신비로움에 더불어 화가 베르메르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어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담아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진주 귀고리 소녀'는 '그리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소녀는 타일공이었던 아버지의 부상으로 인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화실을 청소해주며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소녀는 야채를 다지며 색색깔의 채소를 배치할 줄 알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주인이 그리는 그림을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다만, 소녀의 아버지는 이를 잘 몰랐지만. 화실을 청소하고 주인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차차 그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하는 감각을 키워나가고, 주인의 그림 속 세계에 매혹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주인은 소녀를 그리기로 한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베르메르의 그림을 세세하게 표현하고, 실제로 그의 작품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그리트의 시선으로 표현하려 하고, 그리트의 입을 통해 그리트의 아버지에게 그림을 말과 글로 옮기는 시도를 한다는 것. 그리트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노라면, 본문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그림 속 순간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바뀌고 만다. 완성되기 전의 그림의 묘사에서 단 하나의 포인트를 잡아내어 '진짜 색'이 덧입혀지는 캔버스를 함께 바라보는 그리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카타리나'의 시선을 순식간에 '그리트'의 시선으로 치환해내는데, 거기서부터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은 그리트의 귀에 진주 귀고리가 걸리는 그 순간까지의 미묘한 감정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산만한 그림을 하나로 모아주는 그 하나의 포인트를 잡아내는 순간, 나에게 그저 예쁜 소녀가 그려진 명화가 생명력 있는 그림으로, 한 때 실존했었던 한 소녀의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되는 그 순간은 그림에 있어 까막눈인 나에게 잠시나마 그림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

 

 

  그리고 소녀에게 닥쳐온 부조리……. 허나, 그 당시의 그들에게는 부조리가 아니었으니 한 순간을 그림 속에 각인시켜둠으로써 소녀는 영원의 생명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것이 픽션이라는 것은 『진주 귀고리 소녀』에게 행운일까, 혹은 불행일까.

 

 

 

 

나는 그림 속의 망토며 진주 목걸이를 걸쳐보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여자를 그린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_p.52

 

 

내가 마지막 창문을 닦고 있을 때 그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며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주인님."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창을 닦아야겠다는 이 갑작스런 충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

또 그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는 생각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라."

갑자기 이 방에 유령이라도 나타난 듯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_p.111

 

 

"하지만 모자는 하얀색이라고 그랬잖아."

"예, 그게 참 이상해요. 여러 가지 색깔로 칠했는데, 일단 모자를 보면 하얗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타일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훨씬 단순해." 아버지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푸른색을 사용했으면 그게 다야. 윤곽은 진한 푸른색을, 그림자로는 연한 푸른색을. 푸른색은 푸른색이야."

그리고 타일은 타일일 뿐이죠, 그의 그림일 수는 없어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흰색이라고 느끼는 것이 단순한 흰색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것은 그가 내게 가르쳐준 교훈이기도 했다._p.115

 

 

"이제 나를 봐라."

나는 고개를 돌려 왼쪽 어깨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나의 눈과 얽혔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의 잿빛 눈동자가 굴 껍질의 속처럼 참 아름답다는 생각 외에는.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내 얼굴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움직이지 마라."

그는 나를 그리려 하고 있었다._p.214

 

 

나도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 이상해서 그림을 오래 볼 수는 없었지만, 진주 귀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즉시 알 수 있었다. 진주 귀고리가 없는 그림은 나의 눈과 입, 흰 슈미즈, 내 귀 뒤의 어두운 공간, 모든 것들을 따로따로 놀게 했다. 진주 귀고리는 이 모두를 함께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그림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진주 귀고리는 또한 나를 거리로 내몰 것이다._p.245

 

 

 


 

 

 

_20140420~201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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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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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결한 말 한 마디, 문장 하나로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격언의 위대함일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상사를 관통하는 격언이 단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를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기다려온 게 아닐까. 그렇다, 보르헤스 역시 한 격언이 아닌 한 권의 '책'을 기다려왔다.





  그렇다고 페터 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그 '한 권의 책'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책은 뭐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 할 뿐이다. 스밀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눈(雪)을 읽는' 방법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아마 그에 대한 설명을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를 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신이 쓰는 언어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는 다른 무지개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깨달았다. 색을 나타내는 단어가 다양한 만큼 세세하게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어라는 것이 인간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정해버릴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사례다.


  스밀라는 '눈'에 관한 언어는 상당히 천부적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덴마크인이었으나 이누이트인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얼음과 눈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눈을 나타내는 단어는 얼마나 세분화되어있을까. 그런 스밀라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에 대한 감각'으로 아랫집에 살고 있던 어린 소년 이사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나선다.


  이사야는 왜 죽은걸까? 문제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이다. 고소공포증에 계단조차 잘 오르지 못하는 소년은, 왜 지붕 위에서 추락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그 이유는 어느 정도 간결하게 압축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스밀라의 세계에 잠시 발을 들여놓아 보자. 그녀의 세계는 상당히 간결한 설명이 이어지나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솔직히, 스밀라는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나 역시 그것을 완전하게는 커녕 조금이라도 그 최선을 해석하려 애쓸 뿐 그 이상의 상호작용은 없었노라 말하겠다.




  하지만 확실히 변한 건 있었다.


  나는 명료함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것이라 당혹스러웠고, 이 책 속에서 스밀라의 돌진을 지켜본 바 내린 결론은 덴마크로 대변되는 문명과 그린란드의 미개척지로 대변되는 자연의 대립과 일방적인 폭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이조차 책을 읽은 다음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왠지 모를 찝찝함에 몸부림을 칠 정도로 눈 앞에 무언가를 착실하고도 확실하게 정리해두고 싶은 내 성격에 기인해 겨우겨우 스밀라의 세계 속 한 개의 파편을 집어온 결과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밀라는 그저 잘 모르겠더라도, 꼭 정리를 할 수 없더라도, 그냥 나름대로, 비유를 통해서라도 함께 그 세계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슬쩍 질문을 던진다. 600페이지가 넘는 빽빽한 묘사 끝에 우리는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스밀라의 세계를 함께 이해하려 애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마치 음악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음악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언어로 변환시켜 보려 하는 것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처럼.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그런 이야기이다. 꼭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할지언정, 그 세계를 지켜보고 또 이해하려 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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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의 착한 빵 - 브레드홀릭's 다이어리 Breadholic's Diary
스즈키 모모 지음, 김정연 옮김 / 테이크원 / 2013년 1월
절판



사실 빵 뿐만 아니라 밀가루 음식을 전반적으로 포함하는 거지만, 나는 밀이라는 곡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살이 찌지만 어쩔 수 없다.ㅠ_ㅠ 빵 역시 내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음식 중 하나.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저녁으로 빵을 먹는 것은 꽤 힘든 것이, 아침이나 점심을 빵으로 때우면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 싶지만, 저녁에 빵을 간단하게 먹고 있노라면 포만감보다는 '아 그래도 밥을 먹어야겠는데'라는 허전함이 몰려든다. 그런 걸 보면 어릴 때부터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이라는 땅 위에 살면서 이 땅에서 나는 채소와 쌀을 먹으며 살아왔던 오랜 식성은 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 사람들이 밥을 먹지 않고 다른 음식들로만 식사를 하는 걸 보면서도 와 저렇게 하면 배가 부른가? 싶으면서도 그들은 아마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게 내가 정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르는 대로 속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서양의 음식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겉핥기식으로만 알고서 빵을 그저 빵 그 자체로 먹는 걸로 끝이 아니라는 걸, 빵 말고 다른 음식도 다양한 조리법으로 먹고 있다는 걸, 우리가 쌀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반찬도 먹듯 그들도 그럴 것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우치게 해 준 책이 있으니 바로 <모모의 착한 빵>이다. 그러나 함정이 있으니 이 책은 '일본인'이 쓴 책이다(...). 한국에선 이런저런 걸 먹어요, 라고 내가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할 수 있듯 빵으로 하는 식사는 이러저러해요, 하는 프랑스나 독일에 사는 현지인이 아니라니!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빵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일본은 참 일찍부터 카페나 베이커리가 꽤 많이 발달했던 것 같은게 제빵 기술을 배우러 일본에 유학을 가는 사람도 있고 <서양골동양과자점> 같은 만화책이 일찌감치 등장해서 파티셰가 만드는 수많은 디저트류를 보며 군침을 흘렸던 걸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던 역사와 거기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싶은 사회에 깔려있는 탈아시아에 대한 열망(ㅋㅋ)이 조금 느껴지는 대목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확실히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는 다양한 빵의 종류를 만나볼 기회도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울은 어떤지 제가 물정을 몰라요..ㅋㅋ) 부슈 드 노엘이 도대체 뭐냐고요!ㅋㅋ 그냥 저기 파리에 있는 바게트라고 주장하는 빵집에서 나오는 정도로만, 어쩌다 가끔 케이크를 이것저것 먹는 정도로는 감히 빵순이라 하기도 좀 그렇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빵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빵순이인 줄 알았는데.




'나에게 대체 빵은 무엇일까? 애인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렇게 대답합니다. '빵은 애인입니다.'_p.7




그렇게 나의 무릎을 꿇게 만든 저자의 빵 사랑은 정말 대단할 정도다. 나는 빵이 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단 말이다. 하긴, 그 정도이니 빵을 소개하는 책을 만들 생각도 하겠지 싶기도 하다.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저자는 전공을 살려 다양한 빵들과 빵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요리들을 일러스트로 보여주는데, 색연필로 그려낸 빵들은 실물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근데 그걸 무슨 느낌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니 일단 패스하는 걸로.


마지막 챕터에 간단한 홈 베이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그 이전부터 빵들의 이름과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요리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그래, 이렇게 먹으면 배가 부르겠구만! 하고 내가 빵을 먹으면 먹어도 여전히 배가 고픈 이유를 알아차리고야 말았으니, 그렇다, '귀차니즘' 때문인 것이었다(...). 그래도 귀찮아서 밥과 반찬만 간략하게 냉장고에서 꺼내와도 밥은 배가 부르잖아, 하고 애써 자기합리화를 해 보지만 글쎄?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갔던 챕터는 역시 나라별로 다양한 빵을 소개해 주는 부분이었다. 유럽에서 건너간 빵들을 미국식으로 정착시킨 미국 빵─정말 좋아하는 베이글이 미국 빵인 걸 처음 알았다─, 바게트도 알고보니 종류가 다양했던 프랑스 빵, 밀 보다는 호밀을 주로 재배해 호밀빵이 많은 러시아 빵 등등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빵에서부터 잘 몰라 낯선 빵까지 언젠가는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지는구나.


다음 번에는 한 번 시도해 봐야지. 이 빵을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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