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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시 ㅣ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김사과의 <테러의 시>는 그야말로 테러라 할 수 있을만큼 적나라하고 그 적나라함을 어느정도 비틀어 독자에게 충격과 분노를 끼얹는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 충격과 분노는 곧 갈 곳을 잃어버린다.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내야할까? 그렇게 살고 있는 제니와 리에게? 제니와 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낯설다 생각할 수 없는, 그래서 이 테러는 나를 향한 것은 아니라고,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나 시선을 슬그머니 돌려버리는 나에게?
그러나 사실 '테러'는 무자비하게 가해진 폭력이니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름부터 떡하니 <테러의 시>라는데 뭐 어떡해.
상당히 적은 분량이지만 김사과의 <테러의 시>는 테러를 위한 시어들을 옹골차게 꽉꽉 채워넣은 이야기다. 모래에 파묻힌 도시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던 ( )는 '제니'라는 이름을 갖추고 서울에서 조선족 매춘부로 바뀌어 살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영국인 불법체류자 '리'를 만난다. 나에게 낯선 이방인이 그들에게 낯선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그 곳에 사는 이방인들과 살아간다. 제니는 여전히 서울에 있다. 제니는 서울을 바라본다.
하지만 제니가 속해있는 서울은 참으로 낯설고 무서운 세계다. 그것은 나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나 역시 작가가 소설 속에서 무자비하게 적의를 드러내며 들쑤시는 낯선 서울의 모습이 두려웠다. 머리로는 느지막이 인식하지만, 그렇기에 가끔 수면 위로 드러나곤 하는 진실에 경악하고 경멸하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눈을 감고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지 않는 그 모습이 두려웠다.
고위직 공무원들의 난교파티, 소통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철저한 미국식에 물들어버린 가정, 불법 섹스 클럽에 드나들며 자신의 열등감을 창녀에게 쏟아붓는 남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 법. 허울뿐인 기도와 동정에 이용되는 사람들. 교회. 고시원. 김밥천국. 자본주의. 그렇게 무너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내리는 모래성 같은 도시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리고 도시의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뀌는 그 순간, 김사과의 '테러'는 시작되고, 두려움과 분노가 쏟아진다.
한편, 그런 세계를 묘사하는 언어는 회화적이다. 말 그대로 언어로 서울을 그린다. 결코 마주보고 싶지 않았던 세계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그녀의 '테러'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다. 모래에 파묻힌 도시에서 이름없는 ( )가 제니가 되었을 때, 제니가 누군가의 제니가 되어 미국식 생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제니가 리를 만났을 때, 제니와 리가 고시원과 교회를 전전할 때,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그 생생한 현실을 그림과 언어 속에 슬쩍 파묻어버린다. 나는 반문한다. 지금까지의 테러는 현실인가요? 아니면 상상인가요? 아니면, 휴머니즘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테러의 시>를 구성하는 시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이들을 만나려 하기에는 이미 책 속에는 적나라하고 불편한 세계가 테러처럼 폭격을 퍼부을 것을 알기에 흠칫 망설여진다. 나는 이대로 끝내야할까, 아니면 한 발짝을 다시 내딛어봐야 할까.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나는 김사과가 언어라는 도구로 퍼부은 무자비한 테러에 분노한다는 것이다. 비록 혼자 분노한 다음 뭘 해야할 것인지는 또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지만. 30분 후에 죽는 거지가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그곳으로 선뜻 달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비겁함 뒤에 숨어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테러의 시>에서 훌쩍 튕겨 나온것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세계의 이방인이 되어서 말이다.
그런 것들을 제니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래서 상상조차 할 수 없으므로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쯤 따라 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다. 이해해 보고 싶다. 부러워해 보고 싶다. 제니는 한 손을 창에 댄다. 창은 차갑고 단단하다. 문득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창은 굳게 잠겨 있다._p.64
제니가 미국식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남자와 아이들이 미국식 아침 인사를 나눈다. 탁자 위에는 미국산 버터와 미국산 오렌지 주스, 미국산 시리얼이 놓여 있다. 미국산 시리얼 옆에 놓인 미국식 샐러드에는 미국식 샐러드드레싱이 뿌려져 있다. 남자가 미국산 유리잔에 든 미국산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미국식 키친 테이블에는 미국산 에스프레소 머신이 놓여 있고 미국식 커피가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산 토스터에서는 미국식 흰 빵이 미국식으로 구워지고 있다._p.75
도착한 부엌은 놀랍게도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제니가 썩은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넣고 씹는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맛. 휴머니즘 그 자체. 휴머니즙의 핵심. 그것은 몹시 역겹다. 쓰다. 썩은 냄새가 난다.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_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