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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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사진에 보이는 정사각형 하나하나가 수십억 개의 별을 포함한 은하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이렇게 보면 이 우주는 너무나도 넓고 광대하여 나는 우주의 한 톨 먼지만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한 톨의 먼지보다 작은 입자들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는 이것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가 놀랍기만 하다. 한 명 한 명이 품을 수 있는 그 우주가.



  누구나 그 우주를 품고 있을지언정(나 역시 그 우주가 있으리라 믿고 싶으므로 누구나, 라고 해 두자.)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이도 있고(역시 나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믿고 싶으므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이도 있다. 리틀 알레힌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어째서 가로 여덟, 세로 여덟의 흑백이 번갈아가며 놓여있는 모눈판에 똑같은 말이 놓여 있을 뿐인데, 그 말이 움직이는 순간 시작되는 드라마는 다르기만 할까.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어떻게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한정된 테이블 위에서 그토록 넓은 우주 속의 별 하나 하나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체스의 말(chess pieces)을 움직이는 이들은 말(言)없는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리틀 알레힌은 언어를 음성으로 표현하는 입조차 필요없다는 듯, 입술을 붙인 채 태어났을 정도로.



  동양의 장기의 기원이 그러했듯 체스도 비슷한 이유로 출발했을 것이다. 결국은 상대편의 왕을 잡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고, 또 감춘다. 그럼에도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은 서로가 품고 있는 속내를 알아차리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낸다.


  리틀 알레힌은 그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아주 능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그저 마스터의 체스 테이블 아래에 고양이 폰을 안고 있으면 충분했다. 테이블 아래, 그 작은 공간 아래에서 그는 심원한 체스의 바다에 잠수하여 헤엄치곤 했다. 마스터와 폰이 떠난 다음, 그는 스스로 성장을 멈춘 채 인형 속을 머물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체스 판 위의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나간다.



  인형 '알레힌'의 제작을 위한 후원자였던 노파 영양은 당연히 '알레힌'과의 첫 대전 상대가 되었다. 리틀 알레힌은 그녀와의 만남을 늘 좋아했다. 그녀는 리틀 알레힌의 체스에서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마스터의 존재를, 마스터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자신의 체스 안에서 마스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리틀 알레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마 미라 정도일까.



  리틀 알레힌은 체스를 통해 마스터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작은 정사각형의 판 위에서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 위에서 가장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기에 바둑판 앞을 떠나지 못하는 소년이 있었다. 히카루는 사이를 만나기 위해 바둑을 두고, 히카루의 바둑에서 사이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 도우야 아키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들 수가 없다. 그저 테이블과 말, 바둑판과 흑백의 바둑알만으로 주조해내는 그들만의 세계를, 시작은 엇비슷하나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질투가 이는 일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체스의 말과 바둑알이라는 매개는 이해할 수 없음에도, 나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하나는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나에게도 똑같은 빈 종이에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우주를 살짝은 엿볼 수 있다는 것. 독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참 다행이다. 리틀 알레힌의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눈물이 흐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을지언정.




  어쨌든 장그래는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바둑을 두고 있다고. 누구나 자신의 우주를 품고 누구나 그 우주를 헤엄치고 있을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우주를 엿보는 방법도 존재한다. 함께 잠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책,이라는 기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 <코스모스>의 이미지는 알라딘의 미리보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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