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브레이크 호텔
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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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인데, 가장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바로 나 혼자만 알고 싶었던 기억, 생각, 마음을 들켜버렸을 때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일본 영화 <사토라레>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여과 없이 남에게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이 안타까웠고, 그의 은밀한 속내까지 견디며 인내해야 했던 마을 주민들이 안쓰러웠다. 물론 희대의 천재,를 보호해주는 명목에서 꽤나 지원금을 받은 것 같았지만.


  영화의 설정일 뿐이니 뭐 그건 그렇다고 하자. 확실한 건, '기억'이란 나만이 가지고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직 나만의 세계에서, 내 마음껏 추억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변형하고, 그것을 간직한다.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것을 만들어간다.




야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_p.361, 작가의 말




  그렇기에 서진 작가의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의도대로 꽤나 '야한' 소설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말하는 '야한 소설'이란 에로 소설도, 로맨스 소설도 아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자가 끄집어낸 기억의 한 조각에 순간 아찔해져 버리고 마는 것, 가장 은밀한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엿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런 것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을 잇는 매개는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이다.



그대 나를 버린 지금, 새로운 거처를 찾아냈어요. 쓸쓸한 거리의 끝에 있는 핫브레이크 호텔(상상 호텔)을. 너무 쓸쓸해서 죽을 것만 같아요. 언제나 붐비고 있는 호텔이지만, 방을 얻을 수 있었다오. 나는 어두운 그 곳에서 울고 있다오…._Elvis Presley, Heartbreak Hotel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기억' 그리고 '하트브레이크호텔'을 매개로 삼고 있지만, 그들을 매개로 하고 있는 소설의 색채는 상당히 다채롭다. 각기 다른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곱 명의 화자는 저마다 독특한 기억을 안고 있는 것이다.

  「황령산 드라이브」를 즐기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 아내를 잃은 뒤 혼자 「두 번째 허니문」을 떠난 남자, 사랑이 어느덧 「당신을 위한 테러」가 되어버린 여자,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살아가는 남자, 채팅 대화방 속에서 「미래귀환명령」을 받은 여자, 끊임없이 「휠 오브 포춘」을 돌리며 현실을 두려워하는 남자, 「내 머릿속의 핸드폰」소리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소설가 서진과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까지.


  소설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고 있는 「황령산 드라이브 Part.1」과 「황령산 드라이브 Part.2」는 처음부터 '동성애'라는 파격적인 코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내를 잃고 홀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신혼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노인은 준비해간 'Chew-X'라는 알약을 먹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들고,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채팅 상대의 말에 워싱턴 DC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엘리사는 서서히 상대의 말에 설득당하기 시작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행운을 거머쥐고 싶은, 다가오는 현실이 너무 두려웠던 한국인 유학생은 카지노에서 좀비와 맞닥뜨리는 등 각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하트브레이크 호텔' 밖에는 그만큼 다양한 배경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바로 각자 등장인물들의 '사랑의 기억'이 머무르고 있다. 아니, 꼭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그들은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한 발 내딛는 순간 간직하고 싶었던 가장 은밀한 기억과 조우하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 물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미남이냐 혹은 벌레들로 우글거리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속도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은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기억의 속도는 제각기 다르다.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행복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과거 그대로 고요히 재생될 수도 있고, 잊고 싶지만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 당시 상황 하나하나가 쉴 새 없이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그런 기억들을 재생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 그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들은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연결되어 미로를 헤맨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지워버린다. 단편 하나 하나에 다양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굉장히 '의외'의 모습을 하면서 그려내고 있는 주제는 생각보다 보편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보편성' 속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고 그 보편적인 '나'를 독특한 상황 속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대신 같은 상황에 처한 '나'의 모습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 나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어, 나만의 은밀한, 그래서 '야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시공간에서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나는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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