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공원
쇼지 유키야 지음, 김성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근데 아직은 다 도중이야."

나보다 세 살 위인 히로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한다. 아직은 이루어가는 도중이라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아직 도중에 있다.

그것은 계속 걷지 않으면, 어딘가로 가고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p.19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은 버스를 타고 15~20분 정도를 타고 시내에 가서 끝없이 이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비로소 도착한다.

예쁜 꽃시계도 있고 이순신 장군님의 동상도,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동상도 있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타워도 있는데다 최근에는 남산을 따라한답시고 울타리에 자물쇠를 걸어놓는 커플들의 흔적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그늘진 벤치에 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고 계시고, 정말 많은 비둘기들이 먹이를 찾아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본다는 아름다운(?) 시선으로 광장을 두리번거리며, 시간이 지나면 가끔 떼를 지어 원형을 그리면서 날기도 한다. 그래봤자 나는 박테리아 투성이라고 기겁하고 도망치지만..

그 밖에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조금 더 나가면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가장 가까운 공원에 오르는 것이다. 친구들과 갈 곳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나 공원에 올라가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다 내려와선 밥을 먹곤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마음먹으면 훌쩍 갈 수 있는 공원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어느 한순간을 고스란히 오려낸 사진. 그 순간을 시간으로 치면 몇 초나 될까? 일 초? 십분의 삼 초?

그 사람이 사진에 찍힌 표정을 한 것은 어느 순간일까? 언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런 표정을 지은 걸까?

사진작가는 그때 무엇을 느끼고 이 순간을 포착한 걸까?

-p.21~22

 

그러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사진'일 것 같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오른 어린 나는 지금도 있는 길쭉하고 구불구불한 용의 위엄 앞에서 눈이 부셔 인상을 잔뜩 쓴 채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비둘기한테 모이를 준답시고 모이 사 달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더럽다고-_-;; 나를 말리신 적도 있다. 동생은 새해맞이 타종 행사와 해맞이 봉사활동을 위해 20살이 되어선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며 그 곳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해 비슷비슷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렇게 문득 찾아갈 수 있는 공원은 최고의 포토 스팟일지도 모르겠다.

 

 


파인더에 비친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사진작가가 포착한 한순간은 분명히 그 사람의 참모습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육학년 때 그렇게 확신했다.

-p.34

 

초등학생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친구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찍고 싶어 찍은 첫 번째 사진은, 가족 사진이었다.

사진작가를 목표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게이지는 가족 사진을 자신의 첫 사진으로 선택한 뒤 틈틈히 공원에 나가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을 거닐고 있는 어머니와 딸의 사진을 프레임에 담은 순간 말을 걸어온 한 남자는, 게이지에게 자신의 부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자신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게이지는, 유리카씨가 딸 가린을 데리고 도쿄의 어느 공원에를 갈 것이다,라는 연락을 하쓰시마씨에게 받으면 카메라를 들고 그 공원을 향한다. 그리고 유리카씨와 가린의 모습을 담는다. 그런데 스치듯 마추져버린 유리카씨의 눈길에서 게이지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매일 도쿄공원에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게이지는 유리카씨와 함께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와 함께 사는 히로, 그리고 오랜 친구 도미나가와 종종 함께 하곤 하는 의붓 누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에 머무른다.

쇼지 유키야의 <도쿄공원>은 그렇게 일상에 머무르는 이들을 그려내고 있는 따스한 이야기다.

 

 


햇병아리 대학생의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수록 내 일상의 범위도 점점 넓어질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한잔하러 가는 것을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내 일상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p.179






카메라 렌즈를 통해 두 모녀를 바라보는 게이지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직접 눈을 맞댈 수 있는 게이지를 둘러싼 일상의 모습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서서히 게이지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감정을 미묘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끈적끈적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 상당히 담백하고 깔끔하다. 전형적인 일본 소설의 담백함이라고나 할까.

 

 


그게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함께 지내는 건 별개겠지만.

어쨌든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지내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거잖아.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그러다가 만나면 언제나, 뭐랄까, 평소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p.228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정말 착하다.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그 일상 속에 머무르며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배려와 함께 따끔한 충고를 잊지도 않는다.

그 소소하고 잔잔한, 공원의 평화로운 모습과 함께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공원을 떠올리게 하면서 상당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을 그려내는 그들의 대화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과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모습도 함께 되짚어보며 이를 상기시켜준다.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이지 않는 것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p.235

 







쇼지 유키야의 작품은 <모닝>에 이어 두 번째다. 그 때도 청춘을 되돌아보는 친구들의 추억 여행을 친구의 죽음과 함께 약간은 미스터리의 요소를 가미해 그려내고 있는 것을 읽으면서 이 얼마나 따스한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이번 <도쿄공원> 역시 마찬가지다. 쇼지 유키야의 시선은 정말 한결같이 따뜻하고 반짝거린다. 이번에도 하쓰시마씨의 미심쩍은 의뢰와 함께 그의 부인인 유키코 씨의 부정을 조금은 의심하는 듯한 요소를 집어넣었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왜 이런 의심스러운 상황을 집어넣었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롭기만 하다. 따스한 시선으로 일관하며 그려낸 공원의 평화로움과 게이지를 둘러싼 일상은 그야말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무래도 우연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게이지가 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우연히 두 사람이, 아니 세 사람인가, 아무튼 그 단란한 가족이 파인더 안에 들어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어.

-p.258

 

그렇지만 실은 호오가 갈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일상적이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소설적'인 대화 속에서 나는 편안함과 오글거림의 양쪽을 계속해서 오갔다.

일본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잔잔함과 담백함은, 일본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곤 하는데 상당히 여성적이고 잔잔한 이 이야기가 그랬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일상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런 말을 어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손발이 오글오글. 나는 그렇게 소설 속 인물이 하는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해 내 마음을 정돈하고 위안을 삼곤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ㅋㅋ

 

 


언젠가는 더 이상 서로를 떠올리지도 않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세계에서 제각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도 꿈결처럼 느껴질 것이다.

초등학교 때 날마다 같이 재미있게 놀았던 몇몇 친구들을 더는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여기 이렇게 함께 있다. 이렇게 함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직은 그 나날 속에 있는 것이다.

-p.264

 





확실한 건, <도쿄공원>은 말마따나 착한 사람들이 그려내고 있는 치유계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떠올리지 않고 제각기 일상을 보내다 문득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 펼쳐보면 평화로운 공원의 풍경과 한없이 착한 그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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