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를 권하는 사회 - 주눅 들지 않고 나를 지키면서 두려움 없이 타인을 생각하는 심리학 공부
모니크 드 케르마덱 지음, 김진주 옮김 / 생각의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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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혼자를 권하는 사회>, 지은이: 모니크 드 케르마덱, 옮긴이: 김진주,

출판사: 생각의 길(아름다운 사람들), 초판 1쇄 발행: 2019년 2월 15일, 페이지: 254쪽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요즘 한창 유행했고, 얼마 전 종영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었다. <혼자를 권하는 사회>의 제목만 보면 관계에 치여 정말 혼자 있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의 개인 심리에 대해 다루고만 있을 것 같은데, 읽다 보면 이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아슬아슬한 감정선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이 꽤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현실 상에서도 내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마스킹 테이프로 밑줄을 주욱 그어가며 열심히 읽었다. 실은 '소확행'과 나만의 '캐렌시아'에 집중했던 2018년부터 이런 마음을 지니고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 스스로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다른 감정도 받아들일 마음자리가 준비될 것이라고 여겼던 시기가 꽤 길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고독 또한 우리가 발전하고 정신을 꽃피우는 데 필수적'이라는 말에 굉장히 공감하며 책을 폈고, 덮을 때 역시도 한 번 더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한 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만의 시간 없이 이루어지는 고찰도 없거니와 그런 고찰 없이 발전한 자아·관계일수록 사상누각이기 때문에. 어떠한 자극이 주어져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쌓아올리기 위해서는 고독은 필수적이다. '타인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욕구이지만, 이런 욕구를 누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혼자인 시간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서적인 성숙이 일어나야 하나의 개체로, 제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다는 견해에도 굉장히 공감하는 바이고.

아울러 책의 내용 중 스카이 캐슬과 연결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내용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아무래도 '미디어가 제안하고 있는 이상적 모델'이다. 스카이 캐슬 안에서도 마찬가지. '우등생'이나 '재벌가'라는 단어에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에 맞게 고급스럽고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연출(소품부터 시작해 삶의 모습, 그리고 사람의 외모나 성격에 이르기까지)들이 이어지는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그 '사실'에 오히려 괴리감을 더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드라마를 보는 동시에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왜 저게 정상일까?' '왜 저런 모습을 당연하게 연출할까?'

아주 예전에 방영했던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볼 때,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있다. 왜 여주인공은 빈곤한 가정 살림에 우는 소리를 하면서 메고 다니는 가방이나 입고 다니는 옷은 왜 하나 같이 명품이냐고. 귀여우면서도 꾸미고 나면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에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까지 장착하고 나면 이건 정말 '사기캐(릭터)'다. 그와 다르게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에서의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또 사랑에 쉽게 울고 웃고 망가지는 주인공을 보면서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공감했었나. '꽃보다 남자'와는 달리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혹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꽤 흡사했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우리네 삶과는 사뭇 다른 스카이 캐슬 주민들에 그리도 뜨거운 반응을 보낸 걸까.

 

스카이 캐슬 안에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 그리고 그에 맞는 형식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스카이 캐슬 입주민은 당연히 돈이 많고, 당연히 학벌도 좋고, 당연히 그에 따라 혜택을 누려 입주의 권한을 얻었다.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기 위해 아이는 당연히 전교 1등을 해야 하고, 희생자가 있음에도 몇 억을 들여 제 아이를 과외 선생에게 보내 공부시키는 모습이 이어지는데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시청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드라마니까, 하며 허구라고만 생각한다기에는 무언가 반응이 남달랐다.

순위권 안에 드는 아이의 족보나 입시 정보를 얻기 위해 학부모(거의 대부분 엄마이지만) 사이에 촘촘히 벌어져 나열된 서열. 심지어 숟가락을 들어 죽을 한 술 뜰 때도 순서를 기다리며 눈치를 보기까지. 드라마가 너무 과하게 연출하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아! 이건 현실을 그린 드라마구나, 그래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로구나, 갑작스레 실감이 났다. 심지어 이 드라마를 보고 과외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는 이야기도 놀랍지가 않았다. 놀랍기도 새삼스럽다. 그들이 (비록 그 금액이나 삶의 모습이 서민과 사뭇 다를지언정) 주고받는 양적·질적 교류가 우리네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첫 직장에서 일하며 학구열이 뜨겁기 그지 없는 입학 설명회를 두세 번 돌아보고도 이런 반응에 의아해 했다니. 나도 참…….

 

서두가 스카이 캐슬 이야기 뿐이라 지루하셨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고독감과 이런 심리는 아주 당연하게도 맞닿아 있어 이야기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개인으로 사회에 발돋움하기까지, 아이들은 가정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빨아들인다. 양분이라 함인 즉슨, 가족이 부어 주는 사랑과 관심이다. 나 자신이 세상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족과 나의 관계가 건강하게 맺어져야 또 다른 타인과의 관계도, 그것이 확장되어 세상과의 관계도 건강하게 맺어질 수 있다.

스카이 캐슬 안에서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를 하는 아이, 상장의 수와 출결과 독서와 성적 전반을 관리하고 감독하며 전교 1등을 무사히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모습이나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지금의 마음·심리 상태는 어떠한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독하고 싶은 때는 없는지' ... 등을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부모의 과정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한다면,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성공가도를 달리며 분명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했던 부모의 마음을 읽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에 매달려 아이들을 열심히 피라미드 끝자락에 올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부모도, 아이도 모두 외롭기 그지없다.

본인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보면 자연스레 고독해진다.

 

영재들이 호소하는 고독은 그들의 인생에 공유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타인의 말과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리고 타인의 이해와 사랑, 경청으로 얻는 위안, 자신의 고통조차 경청해주는 존재에게서 얻는 위안이 없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과의 어떠한 교류도 없는 사람의 일시적 또는 지속적 상태'로서의 고독. 과연 영재보다 고독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혼자를 권하는 사회, 139~140쪽.

 

 

이것이 비단 영재라고 표현되는 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뿌리깊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들이 요즘 얼마나 많은가. 200쪽을 조금 더 넘기다 보면 이런 고독을 타파(?)하기 위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제안이 빼곡히 적힌 페이지들을 읽을 수가 있는데, 너무 쉽고도 당연해서 왜 이런 내용이 써 있을까...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 한창 러닝과 요가, 필라테스 등에 빠져 사는 나로서는 이 방법들이 꾸준하게 지키기 어려운 것들로 차 있다고 생각했다. 난이도의 문제라기보다 의지의 문제에 가깝다. 그러나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도 않았겠지. 어떤 일이든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만큼, 딱 그만큼 얻어낼 수 있다.

그래서 요는, 나와 거리 두는 시간을 가져 보라는 것. 다른 사람들과(가족에만 국한하지 않고) 평등하게 교류하라는 것. (자칫 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SNS와 같은 간접적인 정보들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지금보다 줄이고, 걷고 뛰면서 내가 살아숨쉬고 있음을 체감하고 운동을 통해 내 몸과 직면해보기도 하는 시간들을 가져 보라는 것. 그 과정 속에서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감각을 하게 된다면, 타자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고 좀 더 열렬하게 관계 맺게 되리라는 것.

사회가, 미디어가,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서려면 진정 혼자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성에 기대어 쓴 당연한 이야기들에 물렸고, 통계와 수치를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낸 단단한 글-그중에서도 심리학-을 읽고 싶다면, <혼자를 권하는 사회>를 읽어 보시라 권하고 싶다. 또 스카이 캐슬과 어느 면이 맞닿아 있는지도 찾아내는 즐거움도 있으시리라, 살짝 귀띔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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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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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저자: 강화길 외 28인 (구체적인 작가명은 하단에서 소개), 출판사: 작가정신,

초판 1쇄 발행: 2019년 1월 30일, 페이지: 335쪽

 

 

故박완서 선생님(1931~2011)의 8주기. 선생님의 문학 정신을 기리며 스물 아홉 명의 작가가 모여 단편 소설을 한 편씩 써 냈다. 한국대표작가 29인의 박완서 작가 콩트 오마주. 그를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묶어 낸 책이 바로 <멜랑콜리 해피엔딩>이다. 저자의 소개가 상단에 무척 빈약해 한 분씩 이름을 읊어 본다. 강화길, 권지예, 김사과, 김성중, 김 숨, 김종광, 박민정, 백가흠, 백민석, 백수린, 손보미, 오한기, 윤고은, 윤이형, 이기호, 이장욱, 임 현, 전성태, 정세랑, 정용준, 정지돈, 조경란, 조남주, 조해진, 천운영, 최수철, 한유주, 한창훈, 함정임. 총 스물 아홉 분의 쟁쟁한 작가들이 한 데 뭉친 저력은 '박완서'라는 이름 세 글자다.

 

***

 

 

 

 

 

***

 

나에게 박완서 선생님은 어릴 적 책으로 만난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당시의 내가 뵌 박완서 선생님은 물론 소녀는 아니셨다. 그러나 그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의 자신으로 돌아가 서술하는 그 시점에서는 어린 소녀이기도 했다가, 젊은 대학생이기도 했다. 억척스럽지만 살림을 묵묵히 이끌어 가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했던 그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질만큼 몰입력이 강했던 그 글.

나는 당시 유행했던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선생님의 책도 접했고, 김중미 작가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등을 읽으며 어린 내가 살아가는 삶과 너무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본드 냄새(?) 매캐한 골목골목을 폭력적인 아버지가 잠드실 때까지 수도 없이 돌며 침을 뱉어내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도 이렇게 골목을 돌고 있는 아이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몸을 떨었던 저녁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박완서 선생님이 그렸던 모습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으며 가족을 잃었던 슬픔 어린 이야기, 당시 대학생의 신분 그리고 여성으로 살아가며 목도했던 우리나라의 현실... 그 모두를 덤덤한 문투로, 그러나 힘 있는 서술로 풀어 낸 사람. 그래서 (앞에서 언급했듯) 마냥 '소녀' 같지만도 않았던 사람.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에 살아숨쉬는 또 한 사람의 박완서가 되어 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

 

 

 

***

 

 

책에서는 저마다 다른 인생들을 그리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나 저마다의 작가는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입장도 다른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 자신이 되어 서술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와 연애도 시작하고, 반대로 이별하기도 하고, 부모를 잃은 자식이 되기도 하고, 곧 입양될 곳을 맞이할 소녀가 되기도 한다. 커다란 냉동실에 애착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반짇고리를 고르며 맥주를 살까말까 고민도 하고, 햇빛도 들지 않는 철학과 과사에 앉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홀짝이기도 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고민하며 '펑 예정'인 글을 올리며 소수 의견에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가, 누군가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치환하며 괴로워 하기도 한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밤을 바라 보며, '그렇게 매끈하고 윤기 나고 달콤한 겉모습 속에 이런 걸 숨기고 있었어?' 생각한다.

나는 그 모두가 (성별과 나이 같은 조건들과는 또 상관 없이) 내 모습과도 일면 겹쳐져 있어 때론 씁쓸하고 때론 착잡하고 가슴 아팠다. 그와 동시에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 속,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그런 누군가들과 끊임 없이 스쳐지나가겠지만, 나는 그들의 이런 마음을 모를 것이고 그들 역시 나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씁쓸해졌다. 아마 우리는 이런 무심함과 비공감을 타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소소한 슬픔과 기쁨을 읽어내기 위해서 또 다시 책을, 그중에서도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저 치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해 보고, 깔깔 경쾌하게 웃는 이 사람 뒤에 감춰진 그늘을 몰래 읽기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또 그렇게 생각해 봤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마음을 점점 잘 읽게 되면서 '나는 어른이구나' 감각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런 순간들은 오묘하게도 내가 읽었던 소설 어느 한 장면과 맞물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순간들 속에서 비로소 주인공들의 마음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가 있다. 읽기만 한다고, 머리로 이해한다고, 알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응, 괜찮아, 이해했어. 지혜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힘든 건 그동안 하나도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 잘못이니까,

뭐든 무리해서 극복하려고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 당분간 조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어떨까?

그냥 앞으로도 사사건건 부딪치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서로 못할 것 같아서…….

 

 

멜랑콜리 해피엔딩, 윤이형, 여성의 신비, 173쪽.

 

 

나는 이 대사 하나에 눈을 고정하고 숨을 고르며 여러 차례 읽었다. 나에게 여러 사람들이 해 주었던 말과 너무도 흡사해서. 자기 자신을 탓할 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그 순간에는 누구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나 스스로를 모질게 다그칠 때 오히려 나보다도 나를 더 많이 안아 주었던 사람들의 말. 그것과 참 닮아 있었다.

10년 넘게 친구 관계를 이어오면서, 단 한 차례도 비추지 않았던 친구의 속마음과도 일면 닮아 있었던 이 말. 정말로 하고 싶은 말.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멀리 떨어져 점점 헤어지고 싶은 이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해 힘들었다던 그 말과 닮아 마음이 아팠던... 그 순간의 말과 참 많이 닮은 글이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말을 적재적소에 해 주기도 참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말을 또 얼마나 쉽게 내뱉고 참지 못했나 생각하면. 그래서 그 말이 가시처럼 그네들의 마음에 박혀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고, 또 깊은 마음까지 닿아 힘이 되기도 하고 그럴 것을 생각하면. 말이라는 것이 참 얼마나 이중적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난 또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았나. 그 말을 하며 나는 오롯이 나와 마주하고 있었나. 나는 얼마나 그들과 거리를 두었을까. 그 순간에 했던 말은 정말 나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여러 번 곱씹어 본다. 그리고 살짝 몸을 떨었다.

 

***

 

 

단편 소설 모음집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하나하나 읊어드리지 않음을 양해 바란다. 글은 또 저마다의 경험과, 순간 느끼고 있는 감정, 만나는 사람, 하고 있는 일, 읽고 있는 책, 듣고 있는 노래... 그 모든 조합에 따라 다른 맛으로 읽히기에,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대면하며 이 소설을 읽으시길 바란다. 박완서 작가를 위해 바치는 글이라고는 하나 그 한 편 한 편이 모두 작가들의 땀이고 눈물인 것을 잊지 말고 읽으시기도 감히 바라 본다. 편집자들의 공력이 많이 들어갔을 이 책에, 그리고 이런 기획을 통해 책을 만들어 주신 작가정신 출판사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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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사진관 - 상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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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사진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네오픽션),
개정판 1쇄 발행: 2018년 9월 14일, 463쪽

 

미야베 미유키. 애칭, '미미 여사'의 <고구레 사진관>은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책이라 했다. 읽어본 적 없는 책이어서 기대가 됐고 곧장 서평단에 참여하겠다는 신청글을 올렸다. 대중의 호응이 좋다면 그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싶었고 이전에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는 또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지도 궁금했다.

책을 다 읽고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개정판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로 홍보가 되었는지를. 한 마디로 (개인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담담한 문체로 빚어내는 인간애'라는 말로 이 책을 정의하고자 한다. 부족한 정의이겠지만, 그녀의 책을 꼼꼼히 읽은 독자로서 참 사랑스러운 책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정이 가고, 또 나이나 성별이 나와 다를지라도 일면 나와 비슷한 점이 있어 좋았다고. 상상 안에서 통통 튀며 숨을 쉬는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고. 다만 상(上)편과 하(下)편으로 나뉘어 있어, 그 다음 이야기를 연이어 읽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간략하게 <고구레 사진관>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우선 주인공인 '하나비시 에이이치'를 빼놓을 수 없다. 하나비시 가(家)의 장남으로 애칭 '하나짱'. 아버지(하나비시 히데오)와 어머니(하나비시 교코) 그리고 죽은 여동생(하나비시 후코)과 막내인 남동생(하나비시 히카루, 애칭 '피카짱')을 합해 총 다섯 가족이다(여동생의 영혼이 항상 함께 한다는 부모님의 생각을 존중해 이렇게 소개한다). 거의 가족과 다름 없이 그의 곁에 공기처럼 머무는 친구, 다나코 쓰토무(애칭 '덴코')와 데하루치 지하루(애칭 '탄빵')은 빼놓을 수 없는 감초라 하겠다.

주인공 '하나비시 에이이치'의 생각은 처음에는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보이는데, 책을 몇 장 넘기며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병에 걸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후코'를 함께 한다고 여기는 부모님을 보며 혼란스러워 할 수 있는 동생 피카짱의 마음을 항상 살피려 하는 형이고, 부모님의 마음을 고려해 습관처럼 '뭐, 어쩔 수 없지.' 하며 수더분하게 따르는 아들이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저자의 전작들을 참고하면 추리 소설인가, 선입견(이라고 하면 좀 과한 표현인가도 생각한다마는)을 가지는 독자들이 있으리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고구레 사진관>은 읽는 이의 감정을 마구 헤저어 놓는 긴박감, 피가 낭자하게 흩어지고 누군가를 쫓거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야만 하는 잔인함이나 공포 심리를 주된 정서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들이 주인공 '하나비시 에이이치'가 친구들 혹은 부동산 사장님, 학교 선배 등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차분하게 그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들고, '그 사진에는 왜 저런 표정이 담겨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다. 불안감을 자극할 만한 '어둠' '심령사진' '귀신' 등의 단어는 나올지언정, 그것이 독자들의 공포심을 연달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그 사진의 행적을 주인공과 함께 밟아가면서 쓸쓸한 (마음이거나 혹은 실체로서의) 방 안에서 옹그리고 앉아 있는 각 인물들의 팔다리를 풀게 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안정을 찾게 한다. 그래서 책 속 인물과 읽는 이 모두가 단단히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하고, 내가 겪었던 감정, 혹은 겪지 못했지만 어떤 단어로 정의할 수 없던 감정에 대해 '아' 하고 소리 내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소설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네가 혹시 피카짱한테 '형아, 달님은 왜 높은 데 올라가면 작아져?'라는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야.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
형님의 책임감이라고 했다.
"의미를 모르겠다. 그럼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있는 녀석은 모두 그렇다는 거야?
덴코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아니야. 하나짱은 특별한 예지, 안 그래? 피카짱은 너보다 훨씬 어려. 그 점이 다른 거야. 넌 피카짱이 철들면서 세상 온갖 일들에 '왜? 왜?' 질문을 던지게 된 후로 언제든 대답할 수 있게 준비하는 사람이 된 거라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더라도 언젠가 대답해줄 수 있게. 까맣게 모르는 거라도 왜 모르는지 대답할 수 있게."

/* 79쪽

 

 

 

그리고 하나비시 가(家)에 전(前) 고구레 사진관이었던 오래된 건물을 팔도록 중개했던 부동산의 사장(스도)과 여직원(가키모토)도 초반의 평면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점차 입체적인 캐릭터로 변모하는데, 그들의 캐릭터가 점점 매력 있게 보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납득이 되어서 (그러려고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눈길이 간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특히 그들의 심성, 그리고 심리 상황이 잘 드러나는데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 이들에게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으리라는 생각. 아래는 대표적인 발췌 두어 가지.

 

 

"최근 일 년간 가키모토 씨를 보고 느낀 점인데……."
사장이 팔짱을 끼고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렇게 공격적인 건 사실은 두렵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든 강하게 나가야지 안 그러면 금세 당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거야. 상처 받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려는 거지. 그런 인간관계밖에 모르고 산 것 같아, 지금껏."
… 미스 가키모토는 살아 있는 인간을 두려워한다. 탄빵은 유령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탄빵도 살아 있는 인간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경험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으니까.
:
"중요한 건 평범하게 대하는 거야, 평범하게."
어쩌면 이 스도 사장과 부인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인(大人)이라고 하던가.

/* 319~320쪽

 

 

"당신 말이지, 자각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외투 자락 밑으로 피카랑 비슷할 정도로 가녀린 손이 엿보였다. 뼈만 앙상한 희고 가는 손가락은 이쪽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잡아서는 안 될 뭔가를 잡으러 가버릴 것처럼 보였다.
"스도 사장님과 사모님 댁의 툇마루에 앉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
"당신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이 사장님이랑 사모님에게도 보인단 말이지."
그리고 툇마루는 가족이 사는 장소는 아니라 해도 역시 집의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서 드러눕거나 하면 사장님도 사모님도 걱정하잖아."
:
"설교 좀 하시네, 하나비시 댁 아들."
:
다음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난 이제 전차를 탈 거야."
"어디 가는데?"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일 끝났으니까."

/* 458~460쪽

 

 

 

누군가의 앞에서 마구마구 위로의 말을 쏟아낸다고 해도, 그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는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가닿지 않는 진심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무뚝뚝하게 들리기도 하고 툭하고 지나가듯 던진 말 한마디에 닿는 진심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담담함을 담고 있다. 잔잔하게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각 인물들의 진심이 서투르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뭐랄까, 참... 평화로운 마음이 든다. 추리 소설의 전통적인 맥락과 궤를 같이 하고 있지는 않으나 또 얼핏 비슷한 맥락을 가져 가고 있는 이 책의 흐름이 묘한 나른함과 따뜻함을 담고 있기에 살아가며 이 책이 문득문득 생각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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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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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9월 22일, 427쪽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유독> 전문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기념사진> 전문

 

 

:

300페이지 즈음이다. 저자가 4부에서 시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나열하다 '시는 어떤 특별한 무지의 상태를 포착하는 작업'이라며 이들을 함께 수록한 그 지점에서 서평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혼자 곰곰 어떤 생각을 하다, 책을 읽다, 문득, 생경하게 그려지면서도 특별히 어떤 단어로 얽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이 두 편의 시와 함께 신형철 선생님은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 파트를 다 읽은 나는 단말마 같은 '아' 소리를 작게 한 번 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첫 번째 시에서는 어떤 '냄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너'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바라보면서 '네가 아는 것을 나는 모르는구나' 하는 '나'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저 자신이 아는 것을(나는 그 냄새를, 너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서로 모르고 있으니, 또 '웃음을 멈추면 슬픈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웃음을 마저 즐기기로 한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연인이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함에도 부득불 손안에 들어찬 어둠을 느끼면서 걷고 있다. 이 두 편의 시에서처럼 우리는 삶이 나라는 사람으로 현신하기에 그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로 존재하는, 손안의 어둠과도 같은, 죽음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건 꼭 배우지 않아도 안다. 거미의 노래에서도 '이별은 사랑 뒤를 따라와 떠날 땐 사랑까지 데리고 간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행복의 이면엔 슬픔이 있다. 그리고 우린 그 슬픔을 인지해도 행복하기로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선생님만의 스타일로 비평문과 에세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은 진중함과 솔직함, 문학성이 골고루 배어 있는 글로 대한민국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건드리고 있었다. 올곧게 제 목소리를 내는 한 명의 지식인이 쓴 자기반성의 글이자 현상(現狀)을 짚어 독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돋보기로, 반짝이는 문장들이 가득한 보고(寶庫)로 다가온 이 책을 읽는 내내 아껴 읽는 즐거움이 나를 따라다녔다.

책이라는 건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떤 기준이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다만 삶의 고민과 맞물리는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책 자체로만, 내 감정은 감정 자체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최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내 마음에 집중하고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차례 했으나, 내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자문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책에서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요즘의 나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내가 나에게 한계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다. 동시에 '내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상정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그 모습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하지 말자. 적어도 누군가에게 (무심하게라도) 상처주지는 말자. 나 한 사람의 몫은 제대로 해내자와 같은 마음들.

그런 신념을 잘 지키며 살아도, 나와 가까운(혹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가끔 그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확신을 주기도, 활력을 얻게도 했다. 실은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계에 부딪혀가며 알아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나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 이건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또 타인을 위해서도 꾸준하게 슬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도 이런 마음과 맞닿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폭력에 대한 정의'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다. 신형철 선생님은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마음이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그 반대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타자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마다치 않고 하는 사람이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섬세함으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손쉽게 재단하고 판단하는지 가끔 잊고 살 때가 있다. 내 기준으로 상대의 진심을 호도하는 경우도 많다. 내 아픔이나 슬픔에는 예민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또 이렇게 둔감할 수가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함을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순간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며 톺아보게 된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만 했다고. 그렇게 나를 방어하기 전에 솔직하게 돌아보면 나에게만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 무심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한다. '자기반성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 '나의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흩어지기 직전의 임계점은 어디인가.' 하고. 확신에 차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그 고통스러운 지점에서 상처에 대한 아묾도 성찰도 시작된다고. 나의 지난 27년을 돌아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시절보다 혼자 고민하고 아팠던 시간 동안 성장도 했구나 싶어 외로움에 떨던 그 시간과 감정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고통까지도 부드럽게 만들어 준 시간의 힘에 기대어 나 자신을 반추한다.

 

 

 


 

 

 

맨 처음 언급했던 슬픔과 기쁨은 역설적이게도 항상 함께 한다. 책에서는 '깨어 있음'과 '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짚어내고 있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남이라는 사태를 체험할 수 없'으므로 '자는 사람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 수없이 시행 착오를 겪는 것처럼, 깨어있는 시간을 예비하기 위해 잠드는 건 필수 불가결이다. 슬픔이 따를 것을 알고 있지만 행복하는 데 망설이지 않기로 하듯, 나 역시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나의 슬픔과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일을 미루지는 않기로 했다.

더불어 고백한다. 괴롭고 힘들 때 타인의 상처와 힘들었던 시간을 전해 듣고 위로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그 상처를 되돌아 보아야 했던 상대방은 나와 함께 눈물 흘렸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마음에 큰 위로를 받고 그(녀)와 깊은 유대감을 느꼈음을. 또 나 역시도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힘들어 할 때, 상처를 받은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마음에 깊이깊이 묻어두었던 묵은 감정을 꺼내어 돌아보았던 적이 있었음을. 

 

 

 

 

슬픔을 공부한다는 건 그래서 숭고한 일이고, 세상을 살아가며 아주 당연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라는 생각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 것인가, 듣는 이의 마음에 남아 어떤 형태로 발현될 것인가 곰곰 고민하여야 한다. 나의 삶의 궤적과 맞지 않는다 하여 저 이의 궤적과 맞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도 버리고, 내가 잘 모르는 고통이라 하여 남도 잘 모를 것이라 섣부르게 결론 내리지도 말고.

친한 동생이 말한 적이 있다. '언니는 정말 심지 있는 사람이에요. 강한 사람이고. 누군가를 위해서 슬퍼하듯 언니 자신을 위해서도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털고 앞으로 나가요.' 그래. 같은 맥락 아닐까. 삶으로 슬픔을 공부한 만큼, 고통 공감 능력도 커지리라. 그래서 다른 이의 슬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또 그(녀)의 마음 자리에 가 닿고, 또 그(녀)는 다시 누군가의 마음 자리에 가 닿으리라고. 또 희망을 가져 본다. 진심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또 그 진심의 힘을 전연 부정하는 이도, 느끼지 못할 이도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의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고야 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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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허블, 초판 1쇄 발행: 2018년 9월 5일, 520쪽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Spiral>로, 외국에서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 책 표지의 그림과 글씨체의 조합을 보면 (그리고 외국에서 발간한 책과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책의 디자인의 차이를 비교하다 보면)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은 SF 스릴러라는 분야와 약간 색채가 다르게도, 또 다른 시선에서 보면 잘 어울리게도 느껴진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디자인은 제목이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리는듯 빨려드는 글씨. 그리고 소용돌이를 관조하는듯 올려다 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는 아주 적합한 디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디자인에 어떤 상념을 가지지 않고 가볍게 책을 편 후,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배를 향해 노를 저어 오는 구명 보트에 탄 사람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을 만큼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책을 읽을 당신도 이에 공감하리라고, 또는 책을 읽은 당신도 그리 생각했으리라고 본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일련의 사건들과 대화에 집중하게 되는 데에는 (작가가 설정한) 캐릭터가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런 면에서 작가가 캐릭터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았다고 단언한다.

왜냐, 작가가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 그려낸 덕분에 그 인물의 생김새, 성격, 신념, 취미, 습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함께 떠올리며 이야기의 흐름에 보폭을 맞춰가며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릴러물은 이러한 심리를 잘 따라서 밟아갈수록 더욱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리암 코너 교수의 젊은 시절부터 손녀와 함께하는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럴 법 하다'며 별 어려움 없이 그의 마음에 공감했고, 신념을 지키는 강단 있는 모습에 그를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었다. 비록 여러 균류를 수집하는 그의 손에 굉장히 위험한 '무기들'이 쥐어져 있었기에(그가 일명 '부패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곳에 속한) 그것들이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했지마는.

 

 

 

 

생생함을 주기 위한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스파이, 범죄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일본 731 부대의 실험으로 배양된 최악의 균 '우즈마키(소용돌이라는 뜻으로,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 끔찍한 환각 증상을 보이고 광기에 시달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균류)'가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으로 미군 함대 한 척 전체에 퍼지는 장면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사로잡은 일본의 가미카제 '히토시 기타노'에게서 얻은 우즈마키 균이 든 실린더 하나. 그것이 리암 코너 교수의 손에 있으니 더욱 불안할밖에.

그 실린더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내는 (것만 같은) 리암 코너 교수. 독자 입장에서는 그가 모으고 있는 저 균류의 바다가 지레 불안하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나. 초반 자세하게 묘사되는 우즈마키의 위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을 목도하고도 저들과 공생할 수 있을까. 두렵지 않을까.

새초롬하게 움직이던 마이크로 크롤러(리암 코너 교수가 일할 때 손을 빌리던 기계명)들이 결국 부검을 통해 본인의 위장에서 발견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조용한 공간에서 일하던 코너 교수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위험에 처하리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들은 숨죽여 그 때가 오기만을 손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결국 리암 코너 교수는 다리 위에서 투신한다. 자살할 동기가 없는 사람이 처음 보는 여성과 함께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작스레 달리다 뛰어내려버린 상황이다.

손녀인 '매기 코너'와 리암 코너 교수의 동료이자 제자인 '제이크 스털링'은 함께 유언장을 살피며 단서를 찾아 나간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 앞에 실마리가 하나씩 나타나고, 그 와중 듣게 된 리암 코너 교수의 부검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진실을 향해 한발씩 나아갈수록 어룽거리던 암살자의 그림자는 더욱 진하고 뚜렷해진다. 숨겨진 비밀, 우즈마키의 행방, 그리고 레터 박스와 모스 부호까지. 이 모든 소재가 얽히고 설켜 참혹한 진실로 나아가게 하는 책,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이 책의 매력은 '과학 스릴러'만이 줄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한 추리 과정과 상세한 설명으로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는 점이다. 스쳐지나가는 설명이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하고, 과정과정을 이해하며 읽어나가는 데서 오는 지적 충족감이 상당하다. 아래는 그와 관련한 페이지들을 일부 담은 사진들.

 

 ***

 

 

***

 

 

실험체로 사로잡힌 이들을 가장 빨리 죽인 균류를 수집해 배양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우즈마키', 그리고 그 위험한 무기를 막는 것은 결국 사람. 사람이 만들어낸 비극과 그 비극을 수습하는 사람 간의 숨막히는 관계 속에서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긴장하고 추리하고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코넬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폴 맥어웬의 소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은 '기술 특유의 명암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써낸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로 접할 수 있다'는 점(책 소개에서 발췌)에서 흥미롭다. '과학 스릴러'라는 단어에 끌린 독자라면 과감하게 이 책을 집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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