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2
에리히 케스트너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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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동문학에서 받은 작가 케스트너에 대한 느낌은 ‘재미있다’ 그 한마디로 압축된다. 그런 이유로 <파비안>에서 선량한 아이들이 펼치는 재미난 동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케스트너 식의 재미를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선 그토록 재미났던 아이들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혼란스러운 현실만 남아있었다. 지나치다 싶게 드러내는 주제의식과 함께.

파비안은 잘못 돌아가고 있는 현실에 참여하기 싫다며 방관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서지만 그 역시도 여타의 타락자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중심없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고보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파비안 그도 자신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타락한 자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면 파비안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하는 모두가 상처받기 쉬운 선량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까지 미친다. 현실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해 될대로 되라는 식의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방관하는 냉소주의자들의 천국 말이다.

결국 파비안의 파멸은 타락한 세상때문이지만 자신도 세상의 타락에 일조했으므로 스스로의 책임도 면하기 힘든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파비안은 역자의 말처럼 도덕가보다 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라, 도덕적이지 못한 세상에서 방황하다 스러진 우리네 자화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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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역사
폴 콕스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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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술의 역사>란 거창한 제목과 원색으로 이뤄진 단순한 그림들이 독특한 하나의 의미를 줄 것이라는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일부러 못 그린 그림이 보는 사람에게 평온함을 주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이 책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농담이라고 주장할 진 모르나 실제 책을 펼쳐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그렇고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철학적 메시지? 이런 건 억지로 찾아내지 않는 이상-그럴 시간에 다른 책을 읽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테지만- 찾을 수 없다.

작가는 톡톡튀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겠지만 자기만의 정신세계에 세상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것 같다. 이 책 속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함이 잔뜩 들어있으니 말이다. 이런 재미없는 농담은 돈을 받고 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아주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봐줘서 고맙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평소 믿음을 주던 출판사와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선택한 책인데, 이번에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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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
페터 빅셀 지음, 백인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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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부하지만 그럴듯한 제목에 끌려 골랐다. 그러나 책을 펼치니 내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두 세 페이지의 짧은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어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 그 일화들은 현대인들의 고질병(다들 예상하겠지만 고독, 소외, 상실, 기타등등이다)을 다루고 있는데 시제를 무시한 건조한 문체가 은근한 여운으로 되돌아온다. 그 중 가장 내 마음을 당긴 일화는 <블룸 부인은 우유 배달부를 알고 싶어한다>인데 소통의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아…하고 가슴에 와 닿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상의 조각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보는 사람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할 뿐이다.

책의 뒷 부분은 작가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좀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긴 해도 페터 빅셀 개인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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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파는 소녀 1
다니엘 페낙 지음, 연진희 옮김 / 예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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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출판사의 골칫거리 처리반장이자 대가족의 가장인 뱅은 미혼모가 될 여동생을 위해 출판사 사장 자보 여왕의 검은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짓 작가 행세를 하던 뱅은 누군가의 총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 뒤로 자보 여왕의 과거, 장관과 여동생의 결혼 상대자였던 교도소장간의 커넥션, 뱅의 애인 쥘리의 활약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분위기는 말로센 일가의 포근함이다. 겉으로 보기엔 엉망진창 콩가루 집안일진 모르나 가족 중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다 포용해주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서로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 똘똘뭉쳐 누가 뭐래도 뱅의 소생을 믿는 가족들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피가 낭자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만 잔인하지 않으며 영악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독특한 이 소설은 비교적 큰 음모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엮어 작가의 말로센 연작을 모두 찾아 읽고싶게 만든다.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추리소설 쪽에 가깝지만 글쎄, 나는 그저 유쾌한 가족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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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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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베스트셀러엔 관심없어.’ 매스컴이나 잘 포장된 광고 혹은 시기와 잘 맞물려 별 시덥지 않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을 일부러 한 켠에 제쳐둔 적이 많다. 이 세상에 좋은 책들이 많고 많은데 그깟 상술에 휘말려 시간낭비를 하랴.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 중엔 정말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걸 두고 바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고 했던가! 나의 오만 때문에 숨막힐 듯한 탁월한 언어조합의 마술사 아멜리 노통이 주는 즐거움을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 속상할 뿐이다.

<두려움과 떨림>은 벨기에 인 주인공이 일본의 한 회사에서 겪는, 불합리한 권력에 대한 무력함의 보고서이다. 외국인답지 못한 행동과 자신의 직책에 넘치는 일을 한 결과로-주인공이 겪는 수모는 물론 과장되었지만- 우리네 경직된 직장과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에 동질감을 느끼며 같이 분개하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주인공이 삶의 저 밑바닥으로 한 계단 씩 떨어질 때마다 그녀가 읊조리는 익살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주인공은 불편부당함에 대항은 커녕, 권력의 억지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완성시킨다.

분통터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토록 여유있어 보이는 이유는 아멜리 노통이 외국인이어서일 듯 싶다. 누구나 자신의 곪은 부분을 고발할 순 있다. 그러나 거기엔 아픔이 배어나오고 더군다나 유쾌하게 그려내진 못한다. 그런 점에서 노통이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는 것이 내겐 얼마나 다행인지.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상사가 엑스터시의 절정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던가?

흠, 그건 잘 모르겠어도 적어도 아멜리 노통의 글이 나를 엑스터시의 절정에 이르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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