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해가 안 됐어. 내가 보기에 거기 걸린 그림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만 그려놓았지. 내가 아는 노동자들은 착하고 정직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또 반면에 뺀질이들이 많지. 백구두 신고 다니는 놈들도 많았지. 그런데 그림들은 전부 다 고통 받는 모습만 나오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몇 년 뒤에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한테 물어봤어. "당신들 노동일을 한 경험은 있냐?" 그랬더니, 있다는 거야. 자신 있게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얼마나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보통은 일주일 정도 해봤고 보름 동안 일해 본 사람은 좀 드물게 있고 한 달은 몇 명 있다고 그러더군.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 나는 그들이 노동자를 고통스럽게 그리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지. 몇 년씩 일한 사람도 한 달 쉬다가 일하면 참 힘들거든. 그런데 일주일이나 보름 일하면 얼마나 힘들었겠어. 아르바이트로 공사판에 나가 질통을 지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지. 결국 자기들 모습을 그려놓고선 그걸 노동자라고 그린 거였지. 그러니 내가 이해가 안 됐던 거라고. -52쪽
우리 현실이 그렇잖아? 마치 들판에 먹이가 놓여있다고 하면 그걸 힘센 놈이 도끼로 찍어서 먼저 먹어버리 듯이 자본을 향해 힘센 자들이 달려드는 이 현실이 나는 원시적이라고 생각했어. 이걸 현실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얼마나 나쁜 건지. 이건 대항해서 싸워야 할 현실이거든. -88쪽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하며 사업을 설명하는데 내가 얘기를 그럴듯하게 잘했던 것 같아.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했어. 나는 사업하는 것보다도 대화하는 걸 더 좋아했지. 굉장히 재미있었고 마치 내가 신부가 된 것 같았어. 사람들이 마치 고해성사 하듯이 다 나한테 말해 주었거든. 그들 자신이 어떻게 고생하고 살았는지, 자기들이 어떻게 고통 받았는지를 다 얘기하는데 깜짝 놀랐어.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삶이 있다는 걸 알았지. 나는 사람들의 꿈이 어떻게 파괴되고 좌절되는지를 도표를 그려가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어. 그리고 그걸 복사해서 사람들한테 돌리기도 했지. 그걸 가지고 책도 내고 그림도 그려보고 싶었어.-150쪽
그는 몸을 연장처럼 다뤘다. 아니 그의 손은 연필이나 조각도 혹은 도구를 다루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연장 그 자체였다. 그는 메모를 할 때조차 종이를 찾지 못하면 손바닥이나 팔뚝에 사인펜으로 직직 그어댔다. -190쪽
사패산 터널을 정부나 건설회사 측에서는 왜 그렇게 강행하려는 거지?
북한산 관통도로 공사가 얼마나 많은 이권이 걸려 있는 줄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북한산 관통도로 공사로 인해 얻어지는 화강암이 양질이어서 그 값어치가 엄청나다는 것이었지. 민자유치로 인해 거둬들일 수 있는 도로세와 교통세는 이보다 훨씬 더 많지. 이런 사실들은 건설사가 전방위 로비를 해서 언론에 잘 나지도 않았어.-222쪽
그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현상과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너무 쉽게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와의 대화가 난감했던 부분이다. 이를테면 개인의 처지를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설명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인간의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으로 옮아가는 단순한 도식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 지식이나 이론 혹은 논리적인 영역들을 자신이 벼리고 다듬은 칼로 싹둘 베어놓곤 했다. 때로 나는 그의 말이 던지는 단순함에 대해서는 이의를 걸고 싶어졌다. 때로 신념은 아집으로 둔갑하고 확신은 독선으로 돌변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에게는 상투적인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그만의 어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그의 작품이 그걸 더 잘 말해 준다. -245쪽
17째 줄 : 한참을 사진만 그렇데 -> 한참을 사진만 그렇게-265쪽
조급하다고? 종말의 설계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 북극이 녹고 남극의 빙하가 떨어져 나가고 극지방의 기온이 올라가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또 순록들은 모기를 피해 먹이 없는 곳에서 굶어 죽고 있지. 그런데도 이 문명의 천재들은 소수의 권력이나 부를 위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 기껏 오락거기를 만들어내거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기술에 매달려 있지.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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