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 1
미우라 켄타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만화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일이 없다. 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만화방에 가서 꼭 챙겨 보는 만화가 셋 있다. 『창천항로』『무한의 주인』, 그리고 『베르세르크』이다. 『불멸의 용병』이라는 해적판으로 이 만화를 접했던 게 십 년 전쯤이다. 현재는 정상 판권 계약에 따라 무삭제로 꾸준히 나오는 중이다. 더딘 만큼 고대하는 재미도 솔솔해서, 기다리는 맛이 싫증나진 않을 정도로, 아끼는 만화.

이 만화는 여타 영웅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여정>의 서사다. 길은 한자로 道. 정의의 사내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마지막에 귀환(가령, 누명을 벗고 정의를 찾는)한다는 둥의 (오디세이아 같은) 고색창연한 서사가 뇌리를 스치지 않는가? 그러나 작가는 신화와 기독교 바이블과 동화적 판타지를 작신작신 비틂으로써 신선함을 이끌어 낸다. 뿐아니라, 시간적 구성도 전복한다. 현재 - 회상 - 진행 순이다. 현재의 절정인 상태를 아무런 원인 없이 보여주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방식인데, 과거의 서사가 너무나 길어서, 초반부에 절정의 장면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복잡한 서사를 싫어하는 만화 독자(나의 편견?)들이 계속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에둘러서 초반부의 시점을 거친 이 만화는, 현재, 진행 중이다.

전복의 미학을 집중 연구한 서적, 어디 없나? 이 만화는 그리스/로마/북유럽/켈트족 신화를 채용하지만, 기독교 바이블을 전복시킨다. 작품 속, 예언서에 의해 흰 매로 상징되는 그리피스는 예수의 알레고리일 테고, 어둠의 매로 상징되지만 제대로 혐의가 씌워지지 않은 가츠는 아하르 페르츠(적그리스도)의 알레고리인 듯하다. 그리피스는 밑바닥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에 뛰어들어 세상을 자신의 정의(?)로 구원하려는 노모스적인 인물이지만, 가츠는 세계가 체계와 믿음에 의해 다루어지는 게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부딪어 가는 아노미적인 인물이다. 기독교 바이블이 박애로 구원을 이룬다면, 중세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인물들은 칼로써 구원을 하려 한다. 기독교 바이블이 말(진술)이라면, 이 작품은 스크린(묘사)이다. 가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여정을 지속하는 게 아니라, 그리피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간다. 공적(구원) 자아보다 사적(복수) 자아가 더 부각된 영웅이 있던가? 여정 서사에 대한 안티이면서, 기법은 여정이다(제대로 된 풍자!).   

이 만화는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시작된 동화적 판타지를 무시했다. 마법사, 드래곤, 전설의 무기, 여정을 위한 구성원, 공적을 세우는 모험, 멋진 친구와의 조우 등 동화적인 판타지의 일반 소재가 철저히 배제돼 있다. 대신에 듣도 보도 못한 괴물,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검, 외로운 여정, 살육, 강간, 오로지 적들만이 난무한다. 여정의 중심인물인 가츠는 그냥 전사가 아니라 미친(berserk) 전사이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그리피스)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강간 당하는 것을 목도 당했고, 그 순간에 괴물의 발톱에 의해 한쪽 눈이 실명했고, 외눈은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외곬 여정의 암시일 것이다. 또한 한쪽 팔이 잘려서 대포가 달린 철제 의수를 달고 다닌다. 괴물보다 더 괴물같다. 미소년 엘프 사내도 아니고, 애들이 좋아할 자그마한 호비트 주인공도 아니다. 거대한 칼을 차고, 괴물들ㅡ아마도 왜곡된 또 다른 가츠의 자아를 상징하는ㅡ을 살육하고 다니는 인물이다. 일반적인 동화 판타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0여권쯤에는 요정이 변이된 괴물이 나온다. 요정 괴물은, 옛적 소녀였고, 요정을 꿈꾸었고, 요정들에게 틈입했지만, 꿈과는 달리 모습만 아름다운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살육을 일삼다가, 가츠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대포 맞아 죽는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사티로스의 모습을 한 사탄과 마녀들의 디오니소스적인 향연을 일컫는다. 괴테의 『파우스트』1, 2부에 걸쳐 묘사되는 게 유명한데, 이 만화의 20권쯤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알레고리화 한 장면이 등장한다. 고야의 판화를 연상시킨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마녀 화형도 등장한다.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는 여자는 작품의 중심인물인 (가츠의 애인이자 그리피스의 추종자이며 강간 당해서 백치가 된) 캐스커인데, 가츠가 구해냈을 때, 화형식 장소인 탑이 무너진다. 그 탑은 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이며, 고문의 난장이던 곳이다. 가츠에 의해 대주교와 고문단들이 죽고 탑이 무너진 것은, 신이 어쩌구…… 따위의 관념을 상징적으로 파괴한 것일 테다.

동료들을 제물로 삼아 강림한 그리피스는 국가를 만들고, 마치 아더왕의 전설처럼 주변에 전사들과 민중들이 들끓는다. 그 반대편의 가츠는 그저 괴물들을 살육하며 복수를 위해, 민중들의 빛이며 전사들의 왕을 죽이러 여정을 진행한다. 너무 강한 동화 판타지(그리피스)에 맞서는 카니발리즘적 판타지(가츠)의 묘한 알레고리. 나는 그간, 이 꿋꿋한 냉소로 점철된 만화를 사랑해 왔다. 헌데,

초반부터 요정이 여정에 동참한 것은, 이야기의 전달자적인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라고 여기고 그러려니 했었지만, 20권을 넘어서면서부터, 꼬마 도둑이 여정에 합류하고, 24권인가부터는 소녀 마법사가 동료로 합류하고, 가츠를 영웅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여사제와 그 친위기사가 합류한다. 게다가 미친 전사인 가츠는 점점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어이없는 전개에 나는 이 만화가 미워질 지경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강한 동화 판타지에, 이 작가마저 굴복한 것인가? 대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조를 버린 것일까?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잘 해 봤자 잡종 판타지 밖에 안 된다. 작가가 어서 빨리 이성을 되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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