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엘리아라는 필명을 쓴 찰스 램의 '제야'라는 수필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고종석의 소설처럼 잔잔하고 따뜻할 듯싶다. 백과사전에서 램의 간략한 프로필을 읽고 난 연후에야 표제작이 살갑게 다가온다. 누이에 대한 작가의 유난할 것 없으면서도 유난한 생각들은 평화롭고 아늑해서 졸음이 쏟아질 정도다(읽다가 졸았다). 고종석은 정을 끝까지 주는 사람인 것 같다. 백석에 대한 잦은 찬사도 그렇고, 황인숙 시인에 대한 각별한 우정(애정)도 그렇고, 김병익의 해설을 보아도 그렇다(김병익이 워낙 주례사 비평가여도 진심은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서 여리고 약한 이들을 또한 소설로 어루만지고 있는가 보다.

받아들이는 자세를 그만두면 사람은 단세포가 된다.「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의 피터 버갓 씨는 세계적인 지식인인데, 매너리즘에 빠져서 상태가 영 안 좋다. 가면 뒤에는 또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어서, 버갓 씨는 세계적 지식인답게 철저한 가면을 가진 모양이다. '지식인' 운운하는 등등 따위의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역겹다. 남보다 아는 게 좀 많다는 것을 큰 대수라고 여기면 참 곤란하다. 어떤 사람을 박식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건 좋아도, 존경하는 건 곤란하다. 그건 대개 마초들이 하는 짓이다(강자 컴플렉스). 물리력도 자본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요소들을 좀 바르게 써야하는데, 피터 버갓은 참 역겹게 사용한다. 지적 매력을 그대로 성적 매력으로 생각하는 대목은 작가가 참 적나라게 묘사했단 생각도 든다. 바라건대 이런 비판의 예봉은 좀더 다양해야 한다.

「파두」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 사회 곳곳에 벌어지는 논쟁도 이 소설의 마무리처럼 화해는 아닐지라도 조짐만이라도 성의있게 보여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 xx일보의 다수 독자는 그 논조와 풍성한 볼거리에 찬동하는 대중들이겠지만, 영향력 있는 지면이 필요한 '너그러운 자유주의자'들이 더 큰 몫의 독자군을 형성할 거라는 뜨끔한 대목은 각골난망해야 옳다. 소설 속 너그러운 자유주의자인 평론가는, 친구가 그렇게 비판하니까 xx일보에 기고하지 않겠다, 하면서 얼버무린다만, 중요한 건 스스로 각성을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비판하는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가 기고하라 시키면 할 게 아닌가? '뭘 한다'는 것, 물론 중요하다, 마는 '어떻게 한다'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런 내용의 소설이어서, 고종석의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는 놀랄 일이 아니다.

「아빠와 크레파스」와 「카렌」은 작가의 지인들이 보면 참 헛갈릴 것 같다. 「아빠와 크레파스」는 내내 2인칭이어서 (화법이 하소연 하듯) 그 자체로 서글픔이 잘 전달되는데, 주고 받는 서간문이기에 화자가 바뀔 때마다 애절함이 절제가 되어 더욱 애달프고, 그 와중에 돋보이는 인간미가 '정제된 절절함'(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겠다)이어서 독자로서는 보고 있기 아리다. 많이. 실명해가는 소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돼줄 수 없는 이 나라. 이 나라를 의인화하면 독자, 가 돼버리는 것 같아 괴롭다. 작가의 다른 책 『히스토리아』의 장정에서 동년배 부인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다는 문구를 보았다. 「카렌」은 마치 부인에게 헌정하기 위해 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멋대로 추측하기란 나름으로 즐겁다.

근래에 보기 드문 따뜻한 소설집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면 퍽 어울릴 책이다.

사족. 나는 그의 문체가 깔끔해서 기자답다는 생각은 들어도 미문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는다. 고종석 문체에 대한 현란한 칭찬들을 나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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