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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평점 :
긴 여정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집어 든 듯했다. 실제로는 고요히 흐르는 오후의 햇살 사이로 정수기가 제 역할을 해낼 준비를 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지만, 그녀의 소설집을 읽는 내내 그랬다. 뭔가, 끝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버스를 탄 느낌이었다. 정해진 길을 따라, 정해진 속도에 맞추어. 그 버스에 오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나는 버스에 오른 이상, 그 버스에- 아니 어쩌면 버스기사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겨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어떤 기억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홉 개의 이야기, 그 이야기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그들 중 특정한 누군가와 내가 겹쳐졌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그림자일 뿐, 그 누구도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어떤 순간들의 내가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소설을 읽을 때면, 쉽게 그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내게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때문에 이야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특히 한나가 스스로 세웠다는 세 개의 규칙이 그랬고(동쪽 佰의 숲), 시간강사 시절 가르쳤던 제자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으로 마주한 사건이 그랬다(산책자의 행복).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다이어리나 카메라는 비교적 세밀하게 그 이야기가 기록된 경우이고 녹슨 반지, 굽이 닳은 구두 한 짝, 세탁소 라벨이 붙어 있는 비닐 안의 와이셔츠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완성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사물과의 작별 중에서, 73쪽)
그러다 보니, 그녀의 소설집이 하나의 커다란 '유실물 보관창고'라 여겨졌다. 나는 그녀의 소설 사이에서 영화를 꿈꾸었던 나, 어딘지 무모하고 철없었지만 대담하기도 했던 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던 나,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던 나, 부끄러움에 가득 찬 나, 낯선 곳에 홀로 남겨졌던 나를 발견했다. 소설 속 그네들이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손을 뻗어 내밀던 순간- 나 역시 나의 과거에 손을 뻗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경험들이, 나의 무늬를 되새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