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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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배는 선희를 몰랐고, 선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형배는 사랑을 오해했고,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한 행동이 외려 그녀를 그에게로 되돌려보내는 강력한 원인이 되었을 때- 그제야 그는 자신이 선희를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제야, 그 사랑을 해부해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일종의, 반성 차원에서.

2002년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가 출간된 이후, 그는 줄곧 한국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왔다. (나 역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엄청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하지만 그 책이 이미 1995년에 출간되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같은 책이 갑자기 큰 사랑을 받게 된 데는 단연 제목의 변화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95년 출간 당시, 이 책의 제목은 <로맨스>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로맨스'에는 심드렁할 수 있지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심드렁해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알랭 드 보통의 인기는 그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형식' 측면에서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해석하고 나섰다. 물론 연애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했지만, '해석'하고 '해부'했던 측면이 없었다면 그 소설이 그렇게까지 큰 인기몰이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연애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인용하고, 논증하는 과정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뒤섞여 어느 순간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그 빛을, 이승우의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도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마치 물이나 수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파놓은 함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 사랑에 빠졌어, 라고 말한다. 사랑이 사람이 빠지거나 잠길 수 있는 것인 양 물화시켜 말하는 이런 수사는 사랑의 불가항력적 성격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무력하다는 인식이 이 문장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그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가령 수렁에 빠진 사람은 거기에 빠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빠지고, 외부에서 누군가 건져주지 않으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불가항력적이다. (이승우, 사랑의 생애, 9-10쪽)

여러 측면에서 알랭 드 보통의 초기 3부작이 떠올랐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해석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부분도 있었다. 뭐랄까,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이 주로 인용하고 논증하고, 그리하여 분석하는 쪽에 가까웠다면(훨씬 사회과학적이었달까) 이승우의 해석은 고민하고, 반성하고, 그리하여 후회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훨씬 감정적인 것. 더군다나 읽는 맛을 아주 제대로 냈다. (이 글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이 느낌이 제대로 나려나. 아닐 것 같다) 술술 읽히지만, 읽다 보면 모호하고 문장이 끝났을 때 즈음에야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그런 문장들이 계속된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겨냥한다. 더욱 겨냥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사람이지만 하는 사람은 하면서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하면서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이승우, 사랑의 생애, 131쪽)

그러고 보면 형배는 이번에도 사랑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끝맺었다. 이렇듯 사랑의 생애란,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원의 것이리니. 그 찰나의 것에 완전히 매혹되어 며칠간을 보냈던 나는, 이번에도 또 사랑에 속았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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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엽서 수채화 - 스케치 도안으로 누구나 쉽게 그리는
박시현 지음 / 비타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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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그림 목표로 두고,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지도 벌써 석 달째. 벌써 석 달!이라고 쓰긴 했지만, 겨우 석 달째라 아직 초보 티를 못 벗고 있다. 사실 그저 취미미술 정도이고, 전문가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도 없으니 그저 손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려도 좋겠지만- 어디선가 본 건 또 많아서 나도 모를 욕심이 스믈스믈 기어올라온다.

특히 꽃그림! 내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을 장식하는 작가분들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특히 그 꽃그림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걸 보고 따라 그려보자니 아무래도 마음처럼 쉽게 그려지지가 않는다. 형태를 잡기가 일단 어렵고, 작은 디테일들까지 스케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흰 종이가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이 책 <하루 한 장 엽서 수채화>는 예시된 모든 그림의 스케치 도안을 수록하고 있어 좋았다. 스케치북위에 먹지를 올리고 그 위에 도안을 올려 따라 그리면 되는데, 조금 번거로운 과정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안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도안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ㅅ'..!!!)

어쨌거나 덕분에, 로망이었던 꽃그림을 그려본다. 동백꽃부터 작약, 소국, 튤립, 팬지, 아네모네 꽃다발, 벚꽃, 풀잎 리스까지. 그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세히 설명된 과정을 따라 색을 채워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아직 명암표현은 서툴지만, 그래도 계속 자세히 들여다보고 따라하다보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느는 것 같다. (열심히 연습할테다!)

그림 그리는 내 옆에 와 스윽 스케치북을 곁눈질하더니
 '오! 제법 그럴듯한데?'하고 감탄해주는 남편. 그 말에 또 신이나 스케치북을 한 장 더 넘긴다. (그리고 물감과 미니 파레트를 주문했지.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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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 풀고 세기로 엮은 대세 세계사 1 - 인류 탄생부터 13세기까지 대세 세계사 1
김용남 지음, 최준석 그림 / 로고폴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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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교육과정의 첫 세대였던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자습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누드교과서' 되겠다.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이 되면, '수학의 정석' 같은 클래식한 책을 끼고 다니는 것이 중학생 시절 로망이기는 했으나- 막상 수학의 정석을 펼쳐보니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던 것.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누드교과서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옆에 앉아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듯한 친근한 어투로 다가왔다. (거의 전 과목 누드교과서를 쟁여놨던 기억이;ㅁ;...!) 실제로 이 책은 고등학생을 위한 개념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했던 '~했죠', '~라구요' 등의 구어체를 그대로 사용했었다. (컬러 일러스트는 당연했고) 그러니 머리에 쏙쏙 들어올 수밖에! 특히 역사 과목에서 이 전략은 더욱 빛났었는데, 역사란 것이 하나하나 외우려 들면 절대 외워지지 않고- 큰 그림을 보고 흐름을 이해해야만 작은 것들도 외워지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계사를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나라의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구분 짓지 않고 개괄적으로 훑는 것도 어려운 일일진데- 동서양을 한 번에 봐야 하다니! 그래서 늘, 세계사 공부는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그치곤 했다.

 
번번이 포기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세계사를 한번은 훑어야지! 했던 다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그랬다. 유구한 역사 속의 장면 장면들이 눈앞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걸 굉장히 피상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괜히 서글펐다. 게다가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회화라는 것도 결국 역사의 일부. 특히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회화는 언어와 다름없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모르고는 회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책 <대세 세계사>는 한 번쯤 세계사를 훑고는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시작조차 못했던 나 같은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고등학생 시절 끼고 살다시피했던 '누드교과서'의 '친근함' 전략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도 역사를 세부적으로 쪼개지 않고, 큰 그림으로 보게 돕는다.
(누드교과서는 친근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수능 대비용 개념서였기 때문에 한 시대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조각조각 내 설명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정치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경제를 큰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돈이 중요해;ㅁ;...) 의외로 역사는 기후 변화나 과학 기술의 발전, 경제 체제의 변화 때문에 바뀐 측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역사를 거대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기준으로 나누지 않고(그리스시대, 로마시대 등) 세기 단위로 나눠 동서양을 함께 보고 있다는 점도 신선한 시도였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툼한 책이라 하더라도, 인류의 탄생부터 13세기까지를 총망라하고 있으니 지면이 부족한 것은 당연할 터. 어쩔 수 없이 굵직굵직한 사건들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만, 중간중간에 다른 책에서는 보기 힘든 미시사도 꽤 등장해 주위를 환기시킨다. 예컨대 여성문제라던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것. 개인적으로는 '인류의 모든 것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지라;ㅁ;... 문자로 자기들의 삶을 기록하고,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으며, 발효 빵은 물론 맥주까지 만들어 마셨다는 수메르인들에게 호기심이 크게 일었다.

 

띠지에 적힌 홍보문구처럼, 이 책 <대세 세계사>는 팟캐스트를 듣는 듯 술술 읽힌다. 물론 이 책을 한번 스윽 읽었다고 해서, 세계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어떠랴. 감히 엄두가 안 나 시작도 못했던 세계사의 문을 활짝 열었는데. 이렇게 개괄적으로나마 세계사를 쭉- 훑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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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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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정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집어 든 듯했다. 실제로는 고요히 흐르는 오후의 햇살 사이로 정수기가 제 역할을 해낼 준비를 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었지만, 그녀의 소설집을 읽는 내내 그랬다. 뭔가, 끝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버스를 탄 느낌이었다. 정해진 길을 따라, 정해진 속도에 맞추어. 그 버스에 오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나는 버스에 오른 이상, 그 버스에- 아니 어쩌면 버스기사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겨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어떤 기억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홉 개의 이야기, 그 이야기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그들 중 특정한 누군가와 내가 겹쳐졌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그림자일 뿐, 그 누구도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어떤 순간들의 내가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소설을 읽을 때면, 쉽게 그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내게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때문에 이야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특히 한나가 스스로 세웠다는 세 개의 규칙이 그랬고(동쪽 佰의 숲), 시간강사 시절 가르쳤던 제자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으로 마주한 사건이 그랬다(산책자의 행복).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다이어리나 카메라는 비교적 세밀하게 그 이야기가 기록된 경우이고 녹슨 반지, 굽이 닳은 구두 한 짝, 세탁소 라벨이 붙어 있는 비닐 안의 와이셔츠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완성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사물과의 작별 중에서, 73쪽)

그러다 보니, 그녀의 소설집이 하나의 커다란 '유실물 보관창고'라 여겨졌다. 나는 그녀의 소설 사이에서 영화를 꿈꾸었던 나, 어딘지 무모하고 철없었지만 대담하기도 했던 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던 나,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던 나, 부끄러움에 가득 찬 나, 낯선 곳에 홀로 남겨졌던 나를 발견했다. 소설 속 그네들이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손을 뻗어 내밀던 순간- 나 역시 나의 과거에 손을 뻗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경험들이, 나의 무늬를 되새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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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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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두 글자의 이면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맑고 푸르른 두 글자의 뒤에는 처절함과 애처로움, 간절하게 내뻗은 손이 있다. 그래서 '자유롭다'가 아닌 '자유로울 것'이라는 책의 제목은 (개인의 취향을 완전히 저격한!) 상큼한 겉표지와는 달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임경선의 새 에세이. 몇 권의 장편소설도 썼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에세이에 훨씬 마음이 끌린다. 읽어보면 특별한 이야기도 아닌데, 외려 그 특별하지 않음이 나를 더 강하게 잡아끄는지도 모르겠다. 열댓 권의 책을 출간하고, 라디오 게스트로도, 텔레비전 프로그램 게스트로도 종종 얼굴을 내비치는 그녀라 이미 유명인의 반열에 올라섰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에세이는 여전히 담백하고 소탈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 <자유로울 것>역시 그녀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겼다. 그녀의 먹고사는 이야기와 사사로운 감정들과 생각들이.
책장이 술술 넘어가던 와중에,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양자택일의 문제.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남자 A와 남자 B 사이에서 고민하던 일. 딱히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는 일 A와 리스크가 크지만 하고 싶은 일인 B 사이에서의 고민. 생각해보니 우리 삶은 늘 A와 B 사이에 있었다. 우리에게는 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자유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언가를 꼭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를 움켜쥐고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최근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전업주부로써 아이에게 최대한 집중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잠시 흔들렸던 자아를 되찾는 것'. 아이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나의 자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것에는 아직도 마음이 철컹 걸린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엄마'가 되기 위해서 포기한 많은 것들이 아쉽다. 그래서인지, 많은 말을 아껴두고 인용해온 레이먼드 카버의 산문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의 한 구절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직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성숙한 기쁨과 만족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독약을 먹겠다. (173쪽)

어쨌거나,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 그녀가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서둘로 단골 카페로 가 작업을 시작했듯, 아기가 낮잠에 빠져들면 정신없이 책을 찾아들어 읽었다. 그녀와 나의 묘하게 같고 다름 사이에서 작은 쾌감이 일었다. 꼭 그러라고 쓴 것도 아닐 텐데, 어쩐지 조금은 위안을 얻었고, 어쩐지 조금은 (책 제목처럼)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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