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난민 - 제10회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3
표명희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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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푸념 같기도 한 그 구절이 해나의 가슴에 들어와 앉을 때, 내 마음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넋두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누구는 가문에서 정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뻔했고, 또 다른 누구는 베트남 파병 군인이던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캄보디아 보트피플로 살다 왔다. 백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고 도망치기도 했고, 미혼모로, 성소수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늘어놓자면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이들의 사연 역시 기구하다. 모두들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나 있어, 어디서부터 또 누구부터 들여다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읽는 내내, 나를 덮쳐온 혼란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듭 생각을 반복해야 했던 이유는 '내가 그들과 나 사이에 진한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선은 알게 모르게 더 짙어져만 갔다. 선을 지워야지, 생각할수록 선은 켜켜이 쌓여 벽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 교육적으로도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 있어요.
- 난민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이요?
- 그들이야말로 엄청난 삶의 모험을 한 사람들이잖아요. 그것도 전 세계에서 모여든,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이니 말도 문화도 자연스레 접할 수 있고... 쉽게 말해, 인터내셔널 스쿨쯤으로 생각하면 될 거예요. (본문 127쪽)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논리였다. 그런데 그 이상한 논리가 통했다. 듣다 보면 그럴싸하기도 했다. 난민 인정률이 극도로 낮다지만(실제 지난해 1~10월 난민 인정률은 1.9%라고 한다), 그래도 100명 중 2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두 명이 내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가열찬 희망 속에는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하는 98명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애써 외면되었다) 그제야, 두 개의 섬을 연결해 메우고 다지며 자연에 인공을 더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땅(126쪽)이 보였다. 어느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과거도 없고 뿌리도 없는 곳은 그들을 공중으로 붕- 띄워 놓고 있었다. 국가는 그들을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난민이 아닌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난민의 지위를 겨우 빗겨난 우리는, 그들과는 달라 하고 선을 그어대던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하고.

- 우리도 난민이야?
- 아냐. 그냥 넌, 민이야.
- 맞아 난. 민! 민이야. 강민. (본문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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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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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온갖 감정이 담겨있다. 불가능함, 슬픔, 좌절, 그리고 그것을 모두 이겨내는 어떤 의지. 소설 <헌등사>를 읽는 동안 몇 번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렸다. 조각난 다섯 개의 이야기는 모두 3.11 동일본대지진,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분명 일본의 패스포트이지만요, 나는 이미 30년 전부터 독일에 살고 있고, 지금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거예요. 그 이래로 일본에 가지 않았거든요." ...(중략) '그 이래로 일본에 가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고 한 자신이 한심했다. '일본'이라는 말을 들으면 2011년에는 동정을 받았지만 2017년 이후에는 차별받게 되었다. (불사의 섬, 213-214쪽)

2011년 후쿠시마에서 피폭 당했던 당시 100세를 넘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건재하고, 이제까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건강하시네요'라는 말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밤에는 잘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축 처져 피곤하지만 그래도 일어나 일할 수밖에 없다. 2011년 아이였던 사람들은 차례로 병에 걸려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간호가 필요했다. 매일 받는 방사능은 미량이라도, 세포가 활발하게 분열해가면서 순식간에 그 개체를 100배, 1000배로 늘려갔다. '젊다'는 형용사가 젊음이었던 시대가 끝나고, 젊다고 하면 설 수 없다, 걸을 수 없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먹을 수 없다,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고 말았다.

도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먼 곳에서 응시하기조차 어려운 소설 속 일본은 <불사의 섬>에서처럼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세계만은 아니다. 분명 쇄국이 되어 어딘가로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당연한 듯 누리던 문명에서도 멀어져 갔으며, 심지어는 외국어조차 쓰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인물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일상을 살아낸다. 다만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필요한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아직 어린 무메이에게도 그랬지만, 증손자의 죽음까지도 감싸 안아야 하는 요시로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이답다는 것, 젊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무메이의 맑음까지 슬픔으로 감싸 안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욕이 솟구쳐 오른다. 그 원경과 근경, 잘 가공된 것과 날것의 감정 사이에서 나는 그저 손을 벌벌 떨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래, 엄청난 것을 읽었다.

신호가 적색에서 녹색으로 바뀔 때마다 보행자가 일제히 걷기 시작했던 한가로운 시대가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청색이 아니라 녹색인 신호 불빛을 모두 '파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파랗고 파란 신선한 채소, 파랗고 파랗게 우거진 수풀. 그렇지, 청청한 일요일도 있었다. 녹색이 아니다. 파랑이다. 푸름이다. 푸른 바다, 푸른 초원, 푸른 하늘. 그린이 아니다. 응, 클린한 정치? 클린은 아니겠지. 클린이란 소독액처럼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죽이고 싶은 자를 세균에 비유해 실제로 죽여 버리는 화학약품에 지나지 않잖아. 덤불 속에 살며시 숨어서 법률만 비틀고 있는 민영화된 관청은 좆이다. 둘둘 말아서 버려버리고 싶다. 들판에서 피크닉하고 싶다고 증손자가 언제나 말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작은 꿈조차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누구 탓인가, 어떤 것 탓인가, 오염되어 있단 말이다, 들풀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재산과 지위에는 잡초 한 개 분의 가치도 없다. 들어, 들어, 들으라고, 귀이개로 귀지 같은 변명을 파내고, 귀를 기울여 잘 들으란 말이야. (헌등사, 178-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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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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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을 얘기하기에 앞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얘기해봐야겠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공부'라는 말을 숱하게도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펼쳐들었다. 그런데 과연, 문제를 풀고 채점하던 시간들이 진짜 공부하는 시간이었을까? (물론 그 역시 공부다. 하지만 왜 그 공부가 필요한지, 공부란 무엇인지 고민되지 않은 채 시작된 공부는 결국 수증기처럼 증발되어 사라져버린다)

공부는 한자로 工夫, 장인 공에 지아비 부를 쓴다. 지금의 '어른'을 고대에 夫라 썼음을 감안한다면, 공부란 심혈을 기울여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이다. 공부의 사전적 의미인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이 책 <공부의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공부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다. 저자는 공부가 지식이나 정보를 마냥 쌓아올리는 일이 아니라 기존의 환경에 동조하며 살아온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공부란, 주어진 환경과 관계 속에서 보수적으로만 살아온 나를 버리고, 나만의 언어를 가지고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한 준비과정인 것이다.

어쩌다 보니 동조하고 있는 상태에는 무엇을 하면 좋다고 여겨지는가, 무엇을 하면 안 된다고 여겨지는가와 같은 배후에 깔린 코드, 즉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물러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빠져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코드라도 보편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본문 31쪽)

특히 언어와 문화의 관계를 통해 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한 1장이 흥미롭다. 언어 습득이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뿌리부터 세뇌 받은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주류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는다는 것.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이를 자각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언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 점령당했다(36쪽)'는 저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의식적으로 '언어를 일부러 조작하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진중하게 멈춰 서서 환경과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유착되어 왔는지를 분석할 필요성이 있겠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공부란 획득이 아니라 상실이다."라고 썼다. 지금 사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도 썼다. 하지만 생활에 무언가 변화가 일기를 바라고, 기존의 자신이 전복되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변신을 위한 공부는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상실은, 지난날의 나를 잃는 것. 뭔가 허한 기분이 자꾸 든다면, 뭔가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몸이 꿈틀거린다면- 꼭 이 책으로 시작하시기를. (오랜만에 정말 신나고 설레는 독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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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어디에나 있어! - 제21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기획 부문 수상작 사회와 친해지는 책
이남석.이규리.이규린 지음, 김정윤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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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디자인을 시작해, 벌써 몇 년째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디자인을 전공하지도 않았기에 디자인은 내게 언제나 '수단'에 불과했다. 디자인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디자인이 있었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아니, 더 정확히는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다.

이 책 <디자인은 어디에나 있어!>는 어린이를 위해 쓰인 책이다. 너무 오랜만에 읽어보는 어린이용 비문학이라 그 시작이 낯설긴 했지만, 쉽게 쓰인 문체에(글씨도 커다랗고!)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탓에 금방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여러모로 신선했다). 책은 효율적으로 디자인의 이모저모를 설명하기 위해 주인공 예린이와 유진이를 디자인 엑스포에 데려다 놓는다.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예린이와, 그림이라면 영 소질도 재능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진이가 디자인 엑스포를 둘러보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친절한 가이드 아저씨와 함께하는 디자인 엑스포 투어는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했다. 디자인은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예린이는 물론이고, 디자인과는 영 멀 것만 같은 유진이의 삶에도 디자인은 중요하다는 것. 또, 디자인과 창의적 사고와의 관계, 보이지 않는 것을 디자인하는 방식, 디자인으로 어떻게 생각을 넓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신선했다.

프라톤 의자는 정원의 잔디를 확대해 놓은 것처럼 생겼다. (...) 예린이는 의자를 슬쩍 만져 보더니 털썩 몸을 맡겼다. 거대한 잔디밭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자세를 바꿔도 탄력 있는 폴리우레탄 재질의 풀 줄기가 받쳐 주어 편안하고 아늑했다. "개미가 된 느낌이에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디자이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의자에 앉기만 해야 하나요? 누울 수도 있고, 엎드릴 수도 있지요. 사람마다 편한 자세는 다르잖아요. (...) 디자이너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관심이 많아요. 어떤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세심하게 관찰하지요. 덕분에 더 쓰기 좋은 키보드나 기발한 의자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본문 32쪽)

특히 생각을 디자인하는 것, 사람들의 행동을 디자인하는 것은 현직 디자이너이기도 한 내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머리로는 으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내용이지만 실제로 일을 하며 사용자를 얼마나 생각했는가 돌이켜봤을 때 반성이 되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예린이와 유진이가 디자인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하는 사이, 디자이너인 나는 나의 사고가 그간 얼마나 닫혀있었던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다시금 명심할 것, 디자인의 출발점은 언제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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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생태계 - 아키텍처, 거버넌스, 전략의 정렬
암릿 티와나 지음, 김승일.한원석 옮김 / Pi-TOUCH(파이터치연구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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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무려 '아키텍처, 거버넌스, 전략의 정렬'이다. 볼륨도 만만치 않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들었던 것은 바야흐로 소프트웨어 플랫폼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여기- 네이버까지. 모두 멋진 소프트웨어 플랫폼 하나로 단숨에 정상에 올랐다. 이 책 <플랫폼 생태계>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진화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플랫폼과 그 위에 선 앱들로 이루어진 '플랫폼 생태계'를 진화의 주체로 파악했다. 그런 생태계의 개념적 구조와 지배구조를 설명하고, 격심한 경쟁의 환경에서 성공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진화시키는 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내용상 전문용어가 즐비한 게 당연하다. 그래서 어렵지만, 그럼에도 친절하게 설명하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사실 나의 경우는, 저자가 가정한 두 가지의 경우-좋은 기술과 나쁜 비즈니스 전략의 결합이 종종 시장에서 실패하는 것을 이해하는 IT전문가이거나 나쁜 기술이 가장 훌륭한 비즈니스 전략조차도 망칠 수 있음을 이해하는 비즈니스 경영자-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기술의 진화가 경쟁적 생존과 번영에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플랫폼적 사고가 어떻게 나의 일에 적용될 수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었다. 알다시피 소프트웨어 플랫폼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히까지 들어와있으며, 미디어나 콘텐츠쪽 일을 하는 내게 그것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야 500쪽을 훌쩍 넘기는, 전공서같지만 전공서는 아닌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니 더 솔직히는 조금 알게되니까 더 모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또 플랫폼에 대해 고민하며 들었던 한가지 확실한 생각은- 플랫폼이 단지 추세나 유행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속가능하고 우리 모두에게 실용적인 도구로 쓰일 플랫폼을 위해서, 또 그것을 영민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IT전문가에게나, 비전문가에게나 '플랫폼 생태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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