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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온갖 감정이 담겨있다. 불가능함, 슬픔, 좌절, 그리고 그것을 모두 이겨내는 어떤 의지. 소설 <헌등사>를 읽는 동안 몇 번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렸다. 조각난 다섯 개의 이야기는 모두 3.11 동일본대지진,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분명 일본의 패스포트이지만요, 나는 이미 30년 전부터 독일에 살고 있고, 지금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거예요. 그 이래로 일본에 가지 않았거든요." ...(중략) '그 이래로 일본에 가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고 한 자신이 한심했다. '일본'이라는 말을 들으면 2011년에는 동정을 받았지만 2017년 이후에는 차별받게 되었다. (불사의 섬, 213-214쪽)
2011년 후쿠시마에서 피폭 당했던 당시 100세를 넘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건재하고, 이제까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건강하시네요'라는 말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밤에는 잘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축 처져 피곤하지만 그래도 일어나 일할 수밖에 없다. 2011년 아이였던 사람들은 차례로 병에 걸려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간호가 필요했다. 매일 받는 방사능은 미량이라도, 세포가 활발하게 분열해가면서 순식간에 그 개체를 100배, 1000배로 늘려갔다. '젊다'는 형용사가 젊음이었던 시대가 끝나고, 젊다고 하면 설 수 없다, 걸을 수 없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먹을 수 없다,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고 말았다.
도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먼 곳에서 응시하기조차 어려운 소설 속 일본은 <불사의 섬>에서처럼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세계만은 아니다. 분명 쇄국이 되어 어딘가로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당연한 듯 누리던 문명에서도 멀어져 갔으며, 심지어는 외국어조차 쓰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인물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일상을 살아낸다. 다만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필요한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아직 어린 무메이에게도 그랬지만, 증손자의 죽음까지도 감싸 안아야 하는 요시로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이답다는 것, 젊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무메이의 맑음까지 슬픔으로 감싸 안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욕이 솟구쳐 오른다. 그 원경과 근경, 잘 가공된 것과 날것의 감정 사이에서 나는 그저 손을 벌벌 떨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래, 엄청난 것을 읽었다.
신호가 적색에서 녹색으로 바뀔 때마다 보행자가 일제히 걷기 시작했던 한가로운 시대가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청색이 아니라 녹색인 신호 불빛을 모두 '파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파랗고 파란 신선한 채소, 파랗고 파랗게 우거진 수풀. 그렇지, 청청한 일요일도 있었다. 녹색이 아니다. 파랑이다. 푸름이다. 푸른 바다, 푸른 초원, 푸른 하늘. 그린이 아니다. 응, 클린한 정치? 클린은 아니겠지. 클린이란 소독액처럼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죽이고 싶은 자를 세균에 비유해 실제로 죽여 버리는 화학약품에 지나지 않잖아. 덤불 속에 살며시 숨어서 법률만 비틀고 있는 민영화된 관청은 좆이다. 둘둘 말아서 버려버리고 싶다. 들판에서 피크닉하고 싶다고 증손자가 언제나 말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작은 꿈조차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누구 탓인가, 어떤 것 탓인가, 오염되어 있단 말이다, 들풀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재산과 지위에는 잡초 한 개 분의 가치도 없다. 들어, 들어, 들으라고, 귀이개로 귀지 같은 변명을 파내고, 귀를 기울여 잘 들으란 말이야. (헌등사, 178-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