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책을 읽기로 했다 - 서른 살 고시 5수생을 1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기적의 습관!
김범준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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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책을 읽는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도 1년에 80-90권 정도의 책을 읽으니, 꽤나 꾸준히 읽는 셈이다. 그런데 독서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던가 묻는다면 '글쎄'다.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 그런가, 혹시 나의 독서가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매일 책을 읽으면 삶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매일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후,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던 것일까.

그 역시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책을 사고, 또 읽었으나 그것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힘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순간, 취미가 아닌 습관으로 책을 읽어보자고 다짐했고 그 '생활형 독서'가 그를 바꿨다. 30권 정도 읽었을 때 머릿속이 맑아졌고, 100권을 읽었을 때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붙었고, 365권이 넘었을 때는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란다. 그의 독서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의 독서와 나의 독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가 하고 있다는 '생활형 독서'는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책을 찾아 읽는 독서다. 영업직 사원이었던 그는 대인관계나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책을 계속 찾아 읽으면서 업무에 대한 능력을 신장시켜나갔다. 꽤나 책을 읽던 그였기 때문에 자기 계발서 비슷한 느낌의 커뮤니케이션 책들이 시시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읽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읽어나가다 보니 어떤 공통된 지점들(아마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이 행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직원이었던 그는 '일 잘하는' 직원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강의를 하기도, 책을 쓰기도 한다.

이 책 <나는 매일 책을 읽기로 했다>는 무려 13번째 저서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본 그이기에 왠지 어깨에 힘 빡 주고 쓸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렁설렁 읽은 것도 아닌데 한두 시간 안에 다 읽었다.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했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태도가 강건했다. 뭐랄까, 굉장히 열정적인 강연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책은 읽는 사람에게 유용할 때만 그 가치가 있다. 기대감으로 책을 펼친 후 자신에게 필요한 이익을 충분히 얻은 후 닫는 책이 양서다. 좋은 책의 판단 기준은 책을 읽는 자신에게 있다. 겁먹지 말고 주눅도 들지 말고 자신감 있게 책과 마주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60쪽)

책은 '책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 즉 책에 압도당하지 않고 삶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책은 목적이 될 수 없다. 독서 그 자체가 목표가 되면 안 된다. 책은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69쪽)라는 문장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인지 그의 독서는 굉장히 실용적인 느낌이었다. 나 역시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읽는 편이지만- 그의 여러 권 동시에 읽기는 텍스트의 우연한 마주침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독서법이었다. 발췌독이라던지, 책장의 책을 장르로 구분해본다던지 하는 부분들도 그렇게 느껴졌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들이 많아서, 여기저기 밑줄을 좍좍 그었다. '오늘 뭐 읽지?'하는 에필로그까지 다 읽고 났을 때는 나도 무엇인가 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업무에, 또 육아에 필요한 책들을 먼저 읽어볼까, 싶기도 했다만- 그보다 '매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읽은 것에 대하여, 생각한 것들에 대하여- 블로그든 SNS든, 일기장에든. 매일의 힘을 믿는다. 또, 선언의 힘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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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몇 번째 다시 만난 <이방인>인지 모르겠다. 첫 만남은 아주 어려서였고, 대학원 시절 한 번 더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첫 문장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재독이었지만 처음 읽는 것처럼 생경하게 읽혔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뫼르소라는 인물이었다. 전에도 그에게 이토록 몰입했던가, 감정이입이 됐던가 싶었다. 첫 만남 때야 (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에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그가 이상하게만 보였을 텐데- 두 번째, 세 번째에는 어땠던가 싶었다. 낯설기만 했던 사람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던 그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몇 번 다시 읽어 술술 읽혔던 것인지, 그간 내가 쌓아온 시간이 뫼르소와 나의 간격을 좁혀준 것인지, 문장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가며 카뮈의 문체를 옮겨내려 애썼던 역자의 공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셋 다 일 것이다.

 

"자넨 젊어, 자네에겐 그런 생활이 구미가 당길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나저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생활에 변화를 주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들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어떤 경우의 삶이든 그 나름의 좋은 점이 있으며, 여기서의 내 삶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언짢아하면서, 나는 언제나 삐딱하게 대답을 하고 야망도 없어서, 비즈니스에는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일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왔다. 그를 언짢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결코 내 삶을 바꿀 하등의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66-67쪽)

 밑줄을 주욱주욱 그어가며 읽었다. 어디 한군데 걸리는 것 없이 매끈한 문장들이었지만, 자꾸 뒤로 되돌아가 다시 읽게 됐다. 너무 찬란했다. 그래, 찬란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문장들이었다. 특히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겨누고 쏘는 그 장면이 그랬다. '그때-거기'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온 우주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밖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굵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뜨거운 해변에 앉아있는 듯했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올랐다.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는 태양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오롯이 나만이 비치는 찰나의 순간, 뫼르소가 내게 물어왔다. 당신이 보기에도 나는 죄인입니까? 나도 모르게 아니요,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리고 곧 글쎄요, 하고 얼버무렸다.

흔히들 뫼르소를 이야기하면서 '괴팍한'이라는 수식어를 쓴다. 사회는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렸고, 그것은 소설 속에서 죄가 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방인'은 아마도- 사회에, 또 스스로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들을 대변한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죄는 아니다. 우리 개개인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이것은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어떤 선택이었든 그것에 후회하지 않고, 또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은 것 아닐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다시 만난 <이방인>의 1장은, 뫼르소가 괴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들지 않게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러 가서, 누군가 권한 카페오레를 나도 마실 것 같다고. 대체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도 삶은 현재진행형이니까.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내가 저 다른 것을 할 때 어떤 것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내가 이 순간과 이 작은 시작을 위해 이 모든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나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며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 역시 이유를 알고 있다.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이끌어 온 이 부조리한 삶 내내, 모호한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 내게 불어왔고, 그 바람은 자신의 행로 위에서, 내가 살아있을 때보다 현실적이랄 게 없는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 모든 것들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게 뭐가 중요한가? 다른 이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이 내게 중요하게 여긴 것,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했던 무수한 특권적 사람들이, 그와 같이, 내게 형제라고 말하는 것이. (본문 중에서, 165-166쪽)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라는 그의 마지막 소회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는 문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게 성찰해본 자만이 '진짜 오늘'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시간이든, 돈이든, 사람이든)의 노예로 살고 있다 느껴질 때,
다시금 꺼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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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고전의 세계 리커버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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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강자든 약자든, 우리는 사회의 불평등, 그로 인한 부조리들을 끌어안고 산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것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그러다 문득, 그 불평등이 손으로 만져질 듯 생생해졌을 때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분노가 여럿 모였을 때는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이었던지는 생각해 본 바 없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기 훨씬 전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래왔기 때문이다.

루소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사회적 통념에 돌을 던진다. 태초의 인간을 상상하며 평등했던 인간이 어떻게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인간이 타락해왔는지를 쓴 것이다.


조그만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기에 충분히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최초의 인간이 바로 시민사회의 진정한 기초자였다. 말뚝을 잡아 뽑거나 도랑을 채우면서 자신이 동료들에게 “이 사기꾼의 이야기를 따르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 만일 땅의 모든 결실들이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땅 그 자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잊는다면 당신은 타락한 것이다”라고 외친다면,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범죄, 전쟁, 살인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공포와 불운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까?

 

인간은 오랜 문명과 사회생활의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수많은 원인에 의해, 숱한 지식과 오류의 획득에 의해, 그리고 신체의 조직에 생긴 여러 가지 변화와 정념에 가해진 계속적인 충격으로 인해" 애초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현저한 변모를 겪어왔다. 따라서 현존하는 인간에게서 자연 상태의 근원적인 면모와 문명에 의해 형성된 인위적인 면모를 구분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했듯, 누군가 처음으로 나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자들이 그것을 그의 것이라 쉽사리 믿어버렸다면, 인간 불평등의 시작은 그 순간일지 모른다.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는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대한 숲은 인간의 땀으로 적셔야 할 들판으로 변했으며, 머지않아 그 들판에서는 수확과 더불어 예속과 비참이 싹트고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본문, 116-117쪽)

 
여러 명 사이에서 누군가 더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와 '타인'을 함께 보고 비교함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나의 존재가 상대화되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 된다. 서로의 차이에 대한 비교 의식과 자신의 우월성을 대중적으로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구들이 소유욕과 결합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것은 비단 '누가 더 사과를 많이 가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사과는 (그 수가 제일 많지는 않더라도) 유난히 윤기가 나며 달콤해 보일지 모른다. 따라서, 루소는 정치를 인간의 사회적 삶의 핵심적인 결정 요인이라고 보았다. 당시 사상가들이 정치보다는 경제적 요소나 사회적 계급, 또는 여론의 역할을 더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보았던 것을 상기한다면 루소는 굉장히 강한 도전장을 내밀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루소가 봤을 때(그리고 누구나 생각하듯이) 인간의 불평등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들이 꼭 그렇게 불평등한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할 당위성도 없다. 사회의 질서는 새롭게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공동체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모든 것을 리셋하고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지나친 불평등이 존재할 때 그것을 고쳐나갈 수는 있다. (어렵겠지만) 모두가 그것을 삶의 전제로 두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뭔가,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 책을 읽고 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의 순간들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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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노는 정원 - 딱 일 년만 그곳에 살기로 했다
미야시타 나츠 지음, 권남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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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 가장 가까운 슈퍼까지 산을 내려가서 37킬로미터, 서점까지는 60킬로미터, 게다가 휴대전화는 3개 통신사 모두 불통. 당연하게도 텔레비전은 난시청 지역. 그러나 너무 아름다워 '신들이 노는 정원'으로 불리는 곳. 그곳에 가보기로 한다. 아니, 1년 동안 '살아보기로' 했다. 지나고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막상 그 시간을 통과하는 사이에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 낯선 공간에서 네 개의 계절을 지내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에세이 <신들이 노는 정원>은 저자 미야시타 나츠가 홋카이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기꺼이 '가무이민타라'에 가서는 1년간 겪는 이야기다. 일기 형식으로 짧고 소담하게 쓰인 언어 속에는 공간이 주는 맑음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쓰여지는 동안에도 어느 잡지에 연재되고 있었다고 하니, 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에서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대머리였던 강변이 초록색 계곡이 된다. 뾰족했던 벼랑이 초록으로 덮이며 동그래진다. 살아 있다. 치열하게 살아 있다. 6월인데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에조하루제미, 봄매미라고 한다. 기온은 20도가 되지 않는데 온 산에서 매미가 울어서 혼란스럽다. (본문 중에서, 75쪽)

세 아이들은 한 학교에 다닌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다. '모두와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던 도시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라면 정말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수학 수업 대신 수영을 하고, 국어 수업 대신 등산을 한다. 어떤 날은 평일임에도 낚시로 하루의 일과가 가득 채워졌다. 아이들은 강가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그 끝에 오는 달콤함을 배웠으리라. (기다린다고, 또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배웠을 테고) 작은 마을의 특성상, 어느 아이는 누군가를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일이 숙명이다. 어쩐지 부담스러울 것 같은 일대일 수업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 괜찮아 보인다. 함께하는 순간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떠나보낼 때는 진심으로 서로의 내일을 응원할 줄 안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건강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순간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것도 없어서, 사람마다 그 형태는 다를 것이다. 크기도 하고 동그랗기도 하고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고. 울퉁불퉁하거나 색이 특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랄까, 그런 걸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그런 생각도 했다. 뭐든 넘치는 것보다, 조금은 부족한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조금 부족할 때, 우리는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소중함을 배운다. 가치 있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소중히 안을 줄 알게 된다. 그 순간이, 그 깨달음의 순간이 얼마나 예쁜지 :)

신들이 노는 정원.
눈부시고, 건강하고, 신비로운 곳.

산에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내 마음이 다 이상하게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확실한 것은 그 감정이 아쉬움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뭐랄까, 뭔가 마음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뭔가, 전에 몰랐던 것을(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지도 모를 것을) 소중히 품고 간다.

공기가 맛있다. 제일 처음 공기를 ‘맛있다‘고 표현한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공기에는 정말로 맛이 있다. 맛있는 물처럼 순한 맛이 난다. 음표로 말하자면 도레미파솔 같은 맑은 맛. 이곳 공기는 맛있다. (본문 중에서, 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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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그 문학의 근대성 - 18세기 사상적 변화와 박지원의 문학이 갖는 근대성
이선웅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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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실학사상이 고조되던 시기에 양반으로 태어났다. 원한다면 관료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 길을 마다하고 선비로서의 삶을 택한 것은 그가 조선 양반사회의 비리를 통한 부의 축적과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양반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저 책 읽는 자로 살았던 그는 마흔넷에 이르러 청나라를 여행할 기회를 얻어 <열하일기>를 집필하게 된다.

<열하일기>, 과연 그 안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대체 무엇이 적혔기에 읽은 이들 모두가 예찬하고 나선 것일까?

이 책 <열하일기, 그 문학의 근대성>은 저자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것을 재편집한 것이다. 해서 그 목차가 좀 이상해 보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열하일기>의 근대성 분석에 관한 것이고, 2부는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 3부는 서론, 4부는 결론으로 이루어졌다. 순서를 흩트려놓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어쨌거나 중요한 부분을 앞에 두었다. 160 페이지에 달하는 1부 '<열하일기> 근대성 분석'에는 <열하일기>의 문학적 성격과 그 속에 드러나는 조선사회에 대한 시각, 종교 문제, 중국인식과 국제정치사상, 서지적 문제 등 다양한 관점들이 등장하여 흥미를 자극한다. 실로 <열하일기>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지원의 문학은 그 시대에서 뜻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하겠다. (물론 그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단지 여행을 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만을 쓰지 않았다. 그 안에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비판이 스며있고, 돌아가는 곳곳마다 개혁을 논했다. 알다시피 연암은 격동의 18세기를 지내온 실학자다.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발전론 적인 시간과 현실 중시의 의식이 책 속에 분명히 드러나있다. 놀라운 것은(또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늘의 우리가 '나'를 중요시하고 나의 욕망을 긍정하듯, 그 역시도 주체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책을 읽는 동안 '앎'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연암이 비판했던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론에의 답습'을 앎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이론을 그대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적용되는, 그리하여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지혜로서의 앎이다. 우리는 앎을 통해 진보해야 한다. 그 사실을 독자로 하여금 다시 주지시켜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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