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몇 번째 다시 만난 <이방인>인지 모르겠다. 첫 만남은 아주 어려서였고, 대학원 시절 한 번 더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첫 문장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재독이었지만 처음 읽는 것처럼 생경하게 읽혔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뫼르소라는 인물이었다. 전에도 그에게 이토록 몰입했던가, 감정이입이 됐던가 싶었다. 첫 만남 때야 (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에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그가 이상하게만 보였을 텐데- 두 번째, 세 번째에는 어땠던가 싶었다. 낯설기만 했던 사람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던 그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몇 번 다시 읽어 술술 읽혔던 것인지, 그간 내가 쌓아온 시간이 뫼르소와 나의 간격을 좁혀준 것인지, 문장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가며 카뮈의 문체를 옮겨내려 애썼던 역자의 공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셋 다 일 것이다.

 

"자넨 젊어, 자네에겐 그런 생활이 구미가 당길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나저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생활에 변화를 주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들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어떤 경우의 삶이든 그 나름의 좋은 점이 있으며, 여기서의 내 삶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언짢아하면서, 나는 언제나 삐딱하게 대답을 하고 야망도 없어서, 비즈니스에는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일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왔다. 그를 언짢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결코 내 삶을 바꿀 하등의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66-67쪽)

 밑줄을 주욱주욱 그어가며 읽었다. 어디 한군데 걸리는 것 없이 매끈한 문장들이었지만, 자꾸 뒤로 되돌아가 다시 읽게 됐다. 너무 찬란했다. 그래, 찬란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문장들이었다. 특히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겨누고 쏘는 그 장면이 그랬다. '그때-거기'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온 우주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밖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굵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뜨거운 해변에 앉아있는 듯했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올랐다.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는 태양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오롯이 나만이 비치는 찰나의 순간, 뫼르소가 내게 물어왔다. 당신이 보기에도 나는 죄인입니까? 나도 모르게 아니요,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리고 곧 글쎄요, 하고 얼버무렸다.

흔히들 뫼르소를 이야기하면서 '괴팍한'이라는 수식어를 쓴다. 사회는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렸고, 그것은 소설 속에서 죄가 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방인'은 아마도- 사회에, 또 스스로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들을 대변한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죄는 아니다. 우리 개개인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이것은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어떤 선택이었든 그것에 후회하지 않고, 또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은 것 아닐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다시 만난 <이방인>의 1장은, 뫼르소가 괴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들지 않게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러 가서, 누군가 권한 카페오레를 나도 마실 것 같다고. 대체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도 삶은 현재진행형이니까.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내가 저 다른 것을 할 때 어떤 것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내가 이 순간과 이 작은 시작을 위해 이 모든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나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며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 역시 이유를 알고 있다.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이끌어 온 이 부조리한 삶 내내, 모호한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 내게 불어왔고, 그 바람은 자신의 행로 위에서, 내가 살아있을 때보다 현실적이랄 게 없는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 모든 것들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게 뭐가 중요한가? 다른 이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이 내게 중요하게 여긴 것,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했던 무수한 특권적 사람들이, 그와 같이, 내게 형제라고 말하는 것이. (본문 중에서, 165-166쪽)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라는 그의 마지막 소회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는 문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게 성찰해본 자만이 '진짜 오늘'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시간이든, 돈이든, 사람이든)의 노예로 살고 있다 느껴질 때,
다시금 꺼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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