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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물이 끊겼다. 뉴스 앵커는 담담한 목소리로 단수를 보도했다. 일시적인 상황이니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수도꼭지가 말라 버린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지도 몰라. 대통령이 암살된 순간을 기억하듯이.'(본문 중에서, 15쪽) 상상은 금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 이웃이잖아!"
"죽네 사네 하는 마당에 이웃이 어딨어!"
"이 난리가 끝나면 같이 부대끼고 살 사람들이라고!"
"산다는 게 바로 포인트야! 내 짐작대로라면 다 같이 살아남기는 힘들어.
살아남는 축에 들고 싶다면 기존 계획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문단속, 뚜껑 단속 잘하란 소리야."
(본문 중에서, 107-108쪽)
목마른 사람들, 물이 필요한 사람들은 예민해졌다.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물탱크 앞에 줄을 섰다가도 금세 한 덩어리로 뒤엉키고 말았다. 군중이 폭도로 변하는 현장은 눈이 아닌 몸으로 체감되었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누군가는 짓밟히고 깔렸다. 사람들이 밀고 당겨대는 통에 제대로 가동 중이던 물탱크도 쓰러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빈 통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담을 수 있는 물은 흙탕물뿐이었다. 며칠 사이에 상황은 최악에 이르렀다. 물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남의 집 창문을 깨고, 냉장고를 털고, 창고를 뒤지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이 정부는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경계하며 계엄령을 내린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진행됐는데도 뉴스에서는 캘리포니아주의 단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도 녹록지가 않다. 소설 <드라이>는 그 캄캄한 상황 속에서 가장 힘이 약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동생까지 지켜야 하는 얼리사와 그 애를 돕겠다고 나선 켈턴. 아이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단수와 누구를 어떻게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협력과 배신을 거듭한다.
"혹시 저기 물이 있을까?"
"전혀. 예술의 재림을 기다리는 셈이야."
어제까지 웃으며 인사하던 마을 사람들이 며칠 사이에 완전한 타인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한 마을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목마름 앞에서 쉽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어른들을 보며, 사람들이 날카로워지자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경계하며 계엄령을 내리기 바쁜 정부를 보며, 지나가는 자막 몇 글자로 '단수'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아이들은 이 세계를 전혀 믿을 수 없는 곳으로 단정 지었을 것이다. 세계의 잔인하고 냉혹한 민낯을 가감 없이 보고 만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 애들은 어떤 어른이 될까.
단수는 끝났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두 지나간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영웅들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되돌아갈까? 그림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법을 배울까? 각자의 정신적 타격도 언젠가는 무뎌질까? .... 남겨진 수많은 질문에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새로운 보통날에 '보통'이 있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