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버그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맷 매카시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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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년, 3초에 1명의 인류가 슈퍼버그로 사망할 수 있다!

띠지에 적힌 문장을 읽고도 사실 슈퍼버그가 두렵지 않았다. 더 두려운 것은 당장 나의 세계를 덮친 코로나19였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신종 바이러스에 전 세계가 동시에 패닉에 빠졌다. 가늠도 잘되지 않는 엄청난 수의 감염자와 사망자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만 있다. 한국의 상황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강하게 제약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슈퍼버그는 코로나19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를 낳는 미생물이었다. 세계 보건기구는 항생제 내성균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항생제 내성으로 생기는 '슈퍼버그'로 인해 매년 70만 명이 사망하고 2050년에는 전 세계 인구 중 1,000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슈퍼버그란 기존의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신종 박테리아. 오늘날 사용되는 항생제가 대개 70년대를 전후하여 개발된 것임을 감안하면,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 <슈퍼버그>는 인류의 진보와 함께 이어져온 새로운 항생제의 개발 역사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초의 항생제였던 페니실린, 항진균제 니스타틴, 항생제 반코마이신, 그리고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 신약인 달바반신에 이르기까지- 책은 한 권의 의학 소설처럼, 우리 손을 이끌고 실험실로 들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를 연구하고, 그것이 어떤 변이를 어떻게, 왜 일으키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그 질문들의 끝에는 '정답'이 아니라 몇몇이 동의할법한 '가정'이 있다.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은 가운데, 박테리아는 계속해서 변이하고, 더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간다.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이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모든 것이 혼돈에 빠졌다. 책 속에서 그들이 낯선 박테리아 한 종류에 자원을 쏟아붓는 동안, 책 바깥세상에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질서가 흔들렸다. 현대 과학(의학) 기술이라면 못 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았지만, 여전히 코로나19의 치료제는 개발되지 못했다. (최근 며칠 사이 임상시험 소식이 들려왔다) 책 속 세계는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심각했다.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는 일은 기업의 이윤추구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번번이 거절되고 만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2050년이 아니라, 당장 새로운 박테리아가 세계를 점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이도, 슈퍼버그에 고통받는 이도 모두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그 말인즉슨- 우리도 당장 코로나19에, 슈퍼버그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책은 얼마간 영웅담 같기도 했다. 의료계에서 의지를 다져 슈퍼버그를 잡을 치료제를 찾듯이- 우리는 뉴 노멀 new normal을 향해서 주위를 정돈해나갈 필요가 있겠다. 무엇보다 내부로부터의 위험을 무시하며 엉뚱한 방향을 보지 말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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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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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 나 영화감독이 될 거야."

혜나처럼 나도, 엄마 아빠를 불러 모아놓고 선언한 일이 있었다. (혜나의 엄마가 그랬듯) 엄마 아빠는 네가 무슨 영화냐며 반박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부모님 세대가 만나왔던 한국 영화는 그저 시간을 죽이기에나 적합한 싸구려였고, 우리 세대는 박찬욱-봉준호-김지운을 맞아 영화 안에서 빛을 찾던 때였다. 천만 영화가 기적 같았던 시절,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큼직큼직한 상을 받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시절에 나는 반은 영화산업의 장밋빛 전망을 운운해가며, 반은 고집으로 엄마 아빠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혜나는 진짜 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과를 졸업하고도, 현장에서 꽤 오래 몸을 굴리고도 영화감독이 못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혜나가 졸업한 한교영은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일테다. 사실, 거기 들어가는 것도 엄청나게 어렵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내려놓는 삶을 사는 데 반해- 혜나는 여전히 영화를 하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매일 밤을 꼬박 새가며 영화를 봤었는데- 큐브릭의 영화와 원작 소설을 비교해보며,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한 숏, 한 숏 쪼개보며 감탄하고, 부러워하고, 꿈꾸곤 했었는데. 자각하지 못한 사이(어쩌면 외면하려고 했던 사이), 나는 영화와 저만치도 멀어져 있었다. 그랬기에, 혜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태경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고, 부러웠고, 아련하고 또 얼마간은 씁쓸했다.

"우선 영화 잘 봤고요"

라는 말은, 영화제 GV에서 '안녕하세요'와 비슷한 말로 쓰인다. 영화가 너무 좋았어도, 탐탁지 않았어도 관객들은 그 말로 감독과 배우, 제작자에게 말을 건다. 사실 GV는 아주 길어야 20분 남짓. 프로그래머가 직접 던지는 질문이나 감상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관객들의 열기가 뜨겁다 한들 네댓 명의 질문 정도만 받을 수 있다. 그 사이에서 곧잘 만나게 되는 '빌런'은 때로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으로 푹 빠져있던 어떤 장면에서 황급히 빠져나오게 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영화는 영화다'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또, 좋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영화만큼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때로 나는 스스로 빌런이기를 바라면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일 경우에 더 그랬다. 적어도, 내가 마이크를 들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니까. 팬심 반, 영화인으로서 언젠가 같이 만나요-하는 무언의 약속 반. 그런 마음이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조혜나와 고태경 사이 어디쯤엔가 나를 끼워 넣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잘되지 않았다. 그저 닉네임뿐일지라도, 이제는 '영화인'이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기도 했다. 동시에, 영화를 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마치 예뻤던 유년 시절의 한 장면처럼 피어올랐다. (정말 좋아했었는데, 현장의 뜨거움마저도 사랑했었는데- 어째서 한 달에 한 번, 극장에 가는 것조차 어려워져버렸을까)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138쪽)

 

혜나와 고태경의 오고 가는 말들이 찬란하다고 여겨질수록, 나는 내가 영화와 멀어졌다 이유를 찾아내려고 했다. 혜나와 승호가 고민하는 지점과 비슷한 위치 어디쯤에서 나는 돌아보지 않고 뒷걸음질 쳤었다. 꼭 감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지만, 얼마간의 재능은 어떤일에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향한 내 열정은 믿었지만, 내 재능은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좋아하는 어떤 것으로 남겨두기를 선택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영화를 찍을 때의 나와 비슷했다. 감독이라는 자리는, 모니터 앞에 앉아 꿈쩍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이들을 움직이게 해야 했다. 느낌과 생각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수록 촬영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그리하야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케이!'를 외치고 나면, 다시는 그 장면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확신이 필요했지만, 아까의 NG와 금방의 OK에는 크게 다를 점도 (사실) 없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하고 필름을 길게 늘인 다음, 편집실에서 고민해보기로 하면 그 장면은 어떻게 이어 붙여도 마음 같지 않았다.

나는 고태경도 아니고, 혜나도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나의 20대를 오롯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결정을 유보하기 어려워 NG를 OK라고 속이고 살아온 인생. KEEP 해둔 어떤 장면들이 언젠가는 쓰이지 않을까- 무모한 기대를 했던 순간들. ... 어쨌거나 또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서울 영화제 관객상이라니, 마음을 다해 손뼉을 치면서도- 참으로 부럽다. (혜나만은 계속 영화를 했으면!)

+ 다큐멘터리 <GV 빌런 고태경>이 단팥죽을 먹고 싶어지는 영화였다면, 소설 <GV 빌런 고태경>은 영화제에 가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 씨네필 아이디를 목에 걸고, 하루에 네 편씩 영화를 보던 어느 날의 내가 그립다. 아, 또 그렇게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오려나. (일단 체력이;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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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제벨 - 착한 어린이 대상!
토니 로스 지음, 민유리 옮김 / 키위북스(어린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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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대체 몇 번이나 '위험해', '안 돼'를 얘기했던지 모르겠다. 아이의 호기심은 엄마의 '안 돼'를 먹고 자라기라도 하는 듯, 매일매일 새로운 '안 돼'를 얘기하게 된다. 하루에 백 번쯤 '안 돼'를 들었으면 아이도 좀 지칠만할 것 같은데- 어제 이야기했던, 아니 한 시간 전에 그렇게나 애써 설득했던 '안 돼'들은 금세 수면 위로 또 고개를 빼꼼인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집안에서는 쿵쿵거리며 뛰지 않기를, 위험한 물건은 휘두르지 않기를. 음식은 한자리에서 먹기를!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니, 아가 u_u...) 사사롭다 못해 글로 쓰려니 민망하기까지 한 바람을 아이에게 애원하듯 설득하고, 근엄한 척 주의를 주었더랬다. 그러면서도 우리 아이만 이런 건 아니겠거니, 이게 다섯 살의 일반적인(?) 행동발달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대체 뭐지?

제제벨,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제목에 버젓이 '착한 어린이 대상! 제제벨'이라 적혔어도, 제제벨이 진짜 착한 어린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반어법일 거라고 생각했다;ㅁ;...) 그런데 '진짜' 착한 어린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린이라고 공원에는 제제벨의 동상까지 세웠다. 거기에는 예의 바른 어린이 상, 뾰루지 없는 어린이 상, 남을 잘 도와주는 어린이 상, 수학 잘하는 어린이 상, 책 잘 읽는 어린이 상, 글짓기 잘하는 어린이 상 등등의 수상 내역까지 빼곡하다. 흠잡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아이. 부럽다, 하고 넘기다가 '혹 사회성이 좀 부족한 건 아닐까,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한데'라며 어떻게든 제제벨을 '아이'로 보려고 애쓰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미안, 이모가 조금 구차했어 제제벨) 하지만 웬걸. 선물을 받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꼭 '고맙습니다'라고 편지를 쓰는 걸 보니 정말이지 걱정할 것 하나 없어 보였다. 친구들에게 타이른다는 명목의 잔소리를 하는 장면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정말 훌륭했다. 아니, 솔직히 엄청나게 부러웠다. (제제벨의 엄마, 아빠는 걱정 없는 육아를 하고 있을까? 그렇겠지 아마도?)

아이의 완벽함은 세상 밖으로 쉬이 알려졌다. 대통령이 제제벨을 주목했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제제벨에게 쏟아졌다. 제제벨은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의연하고 성숙했다. (너무 완벽한 모습이라, 이 장면부터는 '어른'으로서 아이인 제제벨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제제벨 입장에서는 해야 할 당연한 일들을 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너무 많은 외적 보상을 한꺼번에 받았기 때문이다. 또 그로 인한 또래들의 시기, 질투는 다 어찌한담. 물론 책에는 거기까지는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나름의 근거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쓸데없었던) 걱정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던 차에 마지막 장면에 닥친다. 으아아아아앗, 으음? (무슨 일이 일어났던지는, 그림책에서 확인하세요!)

이제 완벽한 어린이, 제제벨은 없다.

예의 바르고, 남을 잘 도와주고, 수학도 잘하면서 글짓기도 잘 하고, 자기 방을 늘 말끔하게 정리하면서 밥도 잘 먹는 아이란, 세상에 없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당혹스러웠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무덤덤함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야- 너는 너라서 예쁘단다. 네가 제제벨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게, 있는 그대로의 너를 좀 더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볼게. (하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오랜만에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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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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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이야기에 푹 빠져드는 경험이었다. 책 읽을 시간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읽기 시작한 순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틀 정도- 잠을 못 잤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책을 덮으며 무엇이 이렇게까지 책에 몰입하게 했던가를 돌이켜보았다. 책은 '40년 전 코로나19를 예견한 소설'이라고 홍보 문구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사실 우한-400은 이 소설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주인공 티나의 매력, 우연히 만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을 함께 나누게 된 변호사이자 연인인 엘리엇과의 캐미, 그녀를 둘러싼 알 수 없는 힘, 정부의 음모- 그리고 나흘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빠르게 뒤섞여 엄청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딘 쿤츠라는 작가는 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됐지만, 사실 서사는 꽤나 익숙한 구조였다. 읽는 동안 여러 번 김진명이 떠올랐다. 인물 설정과 배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 모두 그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죽은 지 1년이 훨씬 지난 아이가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해 엄마 주변의 기온을 급격하게 떨어트리고,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미스터리하지만, 그마저도 유연하게 잘 빚어내 너무 과하지 않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서 작가의 탁월함을 느꼈다.

(띠지에 의하면) 이 책은 2020년 전 세계 역주행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네덜란드, 미국,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4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읽히고 있다. 물론 40년 전에 쓰인 이 책에서 콕 찍어 '우한'을 언급한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우한-400'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이 책이 단박에 전 세계를 휩쓸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코로나19로 답답한 현실을 완전히 잊게 하는 긴박한 전개와 예상외의 반전이 이 책이 지금, 전 세계에서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왜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쳤던가-하는 것보다- 잠시라도 이것을 벗어나게 해줄 무언가가 더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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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미즈키 히로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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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득, 파견직으로 처음 일하게 된 때가 생각났다. 이제 막 스물여덟이 된 때였고, 무려 네 번째 직장이었다. 이전 직장들에서는 모두 정규직이었지만, 그다지 오래 일하지 못했다. 매번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고, 그럴 때 정규직이라는 것은 버팀목도, 위안도 되지 못했다. 해서 큰 고민하지 않고 파견직을 받아들였다. 공공기관이었고(회사 사정이 갑자기 나빠질 리 없고), 하고 싶은 업무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페이도 꽤 괜찮았다. 사실 하지 않을 이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앉아보니, 만만치 않은 문제가 있었다. 정규직-계약직-파견직으로 이어지는 직장 내 차별이 생각보다 더 심했던 것이다. 월요일 오전, 전체 회의에 파견직은 참여할 수 없었다. 업무를 위한 내부망에도 접속할 수 없어 매번 정규직이나 계약직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그저 '보조'일 수밖에 없던 자리였다. 목소리를 냈고, 많이 싸웠고, (다행인지) 상당 부분 받아들여져 일하는 동안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상처로 남았다.

 

2. 이 책의 주인공 히나코 씨는 나와는 반대의 커리어를 쌓았다.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을 직접 경험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 사회보험노무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책은 그녀가 사회보험노무사로 일을 시작하는 첫 몇 달간을 다룬다. 스스로 비정규직 경험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십대의 젊은 나이. 회사 생활에서 겪을 고충을 맛보기 시작할 때다. 히나코는 클라이언트 기업을 방문해 근로자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각 기업의 문제점과 직면한다. 그녀가 경험하는 것은 노동 시장의 축소판이다. 노동시간의 위장 문제, 열정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의 행태,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그에 따른 육아나 출산 휴가의 문제, 정규직-비정규직에 대한 처우, 산재와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경영구조 개선까지. 작은 회사에 근무하면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또 일하는 동안 결혼과 임신을 하며 겪었던 내 안의 경험들이 툭툭 튀어나와 겹쳐졌다.

 

"그런데 말이야, 육아휴직이라는 게 필요한가?" 갑자기 요코제키 씨가 말했다.

"'육아 및 개호휴업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육아휴직을 제공한다'는 문구로도 기재 의무는 충족하지만 후생노동성의 표준 문서에서는 별도로 만들게 되어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필요하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그거, 아이가 한 살이 될 때까지 쉰다는 말이잖아. 우리에게 육아 휴직은 가당치도 않아."

"가당치도 않다고요?"​ (121쪽)

 

 

"자각이 없으니까 직장 내 괴롭힘을 하겠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니와 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눈요기가 되도록 얇은 옷을 입으라는 게 당연하다고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직원을 바보 취급 하는 게 당연해요? 시대착오도 정도가 있어야죠."

"여성을 직장의 꽃으로 취급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하지. 자, 봐. 새해가 되면 증권거래소에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성들이 쭉 늘어서잖아. 뉴스에서 봤을 거 아냐."

"그야 그건 설빔 같은 거잖아요."

"그럼 왜 여성만 입어? 게다가 젊은 애들만? 머리를 올리는 데도 옷을 입는 데도 돈이 들어. 게다가 띠를 매면 숨쉬기도 힘들어.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데." (235쪽)

 

 

특히 '여성'이기 때문에 직장 내에서 숱하게 겪는 차별과 혐오는 슬프고 또 아팠다. 사회보험노무사 사무소에 일하면서도, 상황과 보기 좋게 타협한 니와 씨도 어쩐지 조금 슬펐다. (다섯 살 딸을 키우는 나는 다시 '출근'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3. 그럼에도 히나코 씨의 뒤에 서 있는 일은 꽤 흐뭇하기도 하고, 뿌듯한 일이었다.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쉽지 않지만,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내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아직 서툴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노무사라면 믿고 맡겨볼 만하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외려 책장을 덮을 때쯤엔- 그녀가 이 일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사업주는 늘 그래, 근로자는 늘 그런 식이지- 하고 그녀만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끼워 넣지 않기를 바랐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오늘의 그 마음으로, 사업주와 근로자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어주는 사회보험노무사가 되기를. 그 안에서 아주 작지만 소중한, 보람을 틔워 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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