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 즐겁게 시작하는 제로웨이스트 라이프
허유정 지음 / 뜻밖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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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의 짧은 외출에도 에코백은 금방 가득 찬다. 물 한 병, 음료수 한 병, 간식거리, 놀잇감, 물티슈. ... 습관적으로 물티슈를 챙기던 손이 멈칫한다. '물티슈가 자연 분해되려면 30-40년은 걸린다던데'하는 얘기가 불현듯 들려왔기 때문이다. 멈칫거리던 손은 결국 물티슈를 포기하지 못했지만, 손수건도 두 장 챙겨 넣었다. 손수건으로 닦을 수 있는 건 손수건을 써야지, 하는 생각으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작은 변화는 이 책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생긴 것이다. 환경에 대한 숱한 글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어떤 글과도 결이 달랐다. 그중 제일 신선했던 부분은 '제로 웨이스트=미니멀리스트=알뜰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그동안의 나의 소비는 늘 적지 않은 쓰레기를 수반하고 있었고, 때문에 내게 제로 웨이스트는 소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소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적잖이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반찬 통을 챙겨가서 떡볶이를 사 오고, 카페에서 내 텀블러를 내미는 것. 비닐에 소포장된 채소 대신 흙이 잔뜩 묻은 채소를 툭툭 털어 에코백에 그대로 넣는 것 역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거라면, 지금의 나도 조금만 애쓰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읽다 보니, 호기심이 마구 일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제품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나는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샴푸 바도 재미있어(?) 보였고, 설거지 비누에도 관심이 갔다. 수세미가 식물 이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진짜 설거지를 할 수 있다는 데서는 또 한 번 멈칫, 하기도 했다. 텀블러를 챙겨 나가는 데 약간의 노력과 의식이 필요하다면, 수세미를 '천연 수세미'로 바꾸는 것, 바디워시 대신 비누를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가능해 보였다. 단지 사용하던 제품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조금 더 밝고 맑게 만들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지가 샘솟았다.

사람 몇 명 노력한다고 되겠어? 나도 안 쓰려고 해봤는데 다 소용없는 것 같더라.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 제도의 문제, 법의 문제라고. 실제로 어느 개인의 실천은 기후 문제를 반전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기후 전문가들 역시 지구 에너지 중 일회용품 소비가 차지하는 건 극히 일부분뿐이라고 말한다. 텀블러를 휴대하는 건 감수성 측면의 역할일 뿐이라고도. 맞다. 그럴 수 있다. 당장 플라스틱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쓴다고 지구가 드라마틱 하게 깨끗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텀블러를 챙겨 나가고, 천연 수세미를 쓰는 일은 환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의 표현이다. 조금 으쓱한 마음으로 구매한 그것은 일상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주 마주치며 환경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것, 자주 환경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는 큰 파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출발은 0에서 시작된다. 저자가 유럽 여행에서 문득 마주친 #제로웨이스트샵 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제로 웨이스트를 만났다. 사실 제로 웨이스트의 끝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보기로 한다. 이렇게 꿈틀거리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음에, 먼저 한 걸음 나아가 본 이들이 있음에 든든함과 감사함을 느낀다. 천연 수세미와 설거지 비누를 주문하며,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그러고 보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이나믹하게 쓰레기를 줄였는지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느냐-일지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어떤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함께 걷기를. (지구를 지킨다는 비장함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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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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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그 무렵 연해주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워낙 척박한 땅이기도 하고, 극동지방이기도 해서 러시아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은밀히 넘어와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은 점차 무리 지어 이주했고, 어느 순간에는 러시아 관리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기에 착취와 강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그 땅을 일궜지만-그 땅에 뿌리를 내린지 오래였지만- 그곳 사람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기차에 올라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이면 도착하는지, 왜 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소설 <떠도는 땅>은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기차에 태워진 스물일곱 명의 조선인들을 그리고 있다. 철컹철컹, 달리는 기차의 리듬에 따라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기차 안의 쾌쾌하고 묵직하던 공기는 어느 순간 누군가의 이야기를 타고 조선 어딘가로 흘렀다가, 연해주 어느 봄날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금실은 다섯 살 되던 해인 1910년 초봄에 아버지의 등에 업혀 러시아로 왔다. 그녀는 여태껏 자신이 태어난 쑥새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너무 어려서 떠나와 추억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는 풍경 한 점도 없으면서 그곳이 사무치게 그립곤 했다. 그런데 자신을 태운 열차가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출발하는 순간 자신의 고향이 연해주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기억 속 희로애락이 담긴 모든 장면은 연해주에 있었다. 가장 슬픈 장면도, 가장 행복한 장면도. 그리고 그녀가 두고 온 모든 것은 신한촌 멜리코브 거리에 있는 집에 있었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당장 죽는다면 자신의 영혼이 열차가 내달리는 방향을 거슬러 멜리코브 거리의 집으로 날아갈 것 같다. (본문 중에서, 75쪽)

 

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이 아니었고, 러시아 땅에 산 지 오래지만 러시아인도 될 수 없었던 그들. 그들이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떠나온 땅에 대한 슬픔과 애잔한 마음, 또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비통한 마음을 표현한 것 아니었을까. ... 옆에 앉은 이에 대한 작은 '정'의 불씨도 꺼져버릴 즈음- 그들은 어딘가에 도착했다. 기차는 멈췄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땅이었다. 그 땅. 그 새로운 곳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꾸려나갈까. 기차 안에서 몇 달 동안이나 이어진 좌절감과 절망감은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게 했는데.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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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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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었다. 슬프게도, 노라는 언니의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자였다.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언니는 위층 복도에 있었다. 몸싸움이었는지, 저항이었는지-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길게 핏자국이 나 있었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다녀가는 사이, 노라의 시야 가장자리가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캄캄해진다. 그럼에도 노라는 이 모든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장난이라면- 나중에 언니에게 어땠는지 얘기해 줘야 하니까.

거품을 내며 흐르는 구름이, 꼭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노라와 레이첼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가 언니를 죽였을까. 아니 그보다, 언니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노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만 했다. ... 레이첼과 노라는 사이좋은 자매였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던 자매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지냈다. 그런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노라로서는 상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노라는 경찰의 이야기를 다 믿을 수 없다. 오래전, 레이첼이 낯선 남자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을 때 경찰이 레이첼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첼과 친구들이 밤새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그녀의 증언은 뭉개졌고, 사건은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채 그대로 종결되었다) 노라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건을 수사해나간다. ... 흐릿했던 것들이 선명해지는 동안, 선명했던 많은 것들이 흐릿해진다. 세상 단 하나의 존재였던 언니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언니는 내가 모르는 많은 부분들을 안고 있었다. 언니가 했던 거짓말들, 노라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계획들. 그 사이에서 노라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를 특별하게 만든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깊숙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삶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노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에 그녀에게 상당 부분 감정이입했지만, 중간 어느 지점부터는 노라를 범인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화자에게 이입했다가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을 반복했던 것 역시, 이 책이 주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가, 아차-싶어 금방 손을 거둬들이고 마는 그런 마음. 동시에 차오르는 이중적인 마음은 아마도 레이첼과 노라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 느꼈을 어떤 감정과 유사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 닮고 싶다는 생각과 내가 아닌 그녀여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 노라의 그런 마음을 읽을 때마다 '아, 두 사람 자매였지'하고 흠짓흠짓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202쪽)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노라는 레이첼을 생각하게 됐다. 그녀가 자주 만났던 사람들을 만났고, 자주 갔던 곳에 가서 (자신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레이첼이 주문했을 것 같은 음식을 먹었다. 레이첼이라면 어땠을까, 그녀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들을 골랐을까.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해나가는 과정은 오로지 피해자의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수사법이자 추모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노라를 강하게 의심했음에도) 범인이 궁금하지 않아지는- 신기한 추리 소설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어도, 레이첼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은 영화를 말하는 레이첼도, 부엌에서 판 콘 토마테를 맛있게 베어먹는 그녀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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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당 오가와 - 오가와 이토 에세이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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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소설을 좋아한다. <츠바키 문구점>도 <마리카의 장갑>도 모두 좋았다.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가 있었다. 기억에 남을만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따뜻하고 정다웠던 분위기만큼은 그 어떤 서사보다도 짙게 남아있다. 이 책 <양식당 오가와>는 그 소설들의 작가 오가와 이토가 쓴 에세이다. <츠바키 문구점>을 쓰고 있던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을 엮은 것이라고 해서, 더욱 흥미가 일었다.

2. 그녀의 소설에서처럼, 에세이에서도 정다운 시간들이 흘렀다. 추운 날에는 깊은 곳까지 따끈해지는 그라탕을, 봄이 되면 미나리를 잔뜩 넣은 샤브샤브를 혼자 있는 밤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고 와인을 마신다. 소중한 사람 펭귄(남편의 애칭이다)과 유리네(그녀와 펭귄이 키우는 강아지다)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손은 바쁘지만, 그럼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그녀 소설과 꼭 닮았다. 사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 따뜻하고 정다운 특유의 분위기가 난데없이 그녀의 손끝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을 리 없다.

<마리카의 장갑>을 읽으면서는 드물게 성실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고, <츠바키 문구점>을 읽으면서는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두 소설 모두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음을 에세이를 읽으면서 알았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오가와의 마음은, 그렇게 여기저기서 작은 빛을 냈다. 그 빛을 보고 있자니 평소 느낀 적 없는 시간의 감각을 체험하게 됐다. 특별히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닌데, 책에서 특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그날만 먹는 음식에, 그날 유독 눈에 띈 어느 장면에,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에 나까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불안하고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 요동치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니. (아무래도 나는 무장해제 당했다고 밖에.)

3. 만들고, 먹고, 만들고, 먹고, 산책하고-가 일상의 전부인 것 같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그녀는 곧 출간될 책의 교정을 보고, 글을 쓴다. 취재차 다녀온 여행도, 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도 중요한 일이었다. 베를린에서 지낸 여름은 조금 특별했는데, 그것은 그녀 부부가 매년 하는 일종의 루틴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베를린은 유리네와 함께였기 때문에 더 특별했고, 생동감 넘쳤다. 베를린에서 배변 패드를 구하기 어려워 발을 동동 구르던 소녀 감성인 그녀가 (험난해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그녀는 무엇과도 싸우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능숙했다. 어쩌면 그 재능이 제철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일과 마주하고 있다.

평소에는 피해서 지나온 '뜻대로 되지 않는 일'. 판단을 잘못하면 앞으로 인생이 장기간에 걸쳐 괴로워질 것 같다. 솔직히 지금도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괴롭지만. 그러나 이럴 때 가야 할 길의 지표가 되어준 것이 라트비아 십계명과 무히카 씨의 말이다. 어쨌든 나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걸 깨달아서 너무 좋다. (57쪽)

그녀가 내려야 할 큰 결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도 지금은 그런 순간이다. 책 속 문장 몇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조금 더 가벼운 삶을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스스로에게 제안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은 끝도 없는 욕심을 가진 사람,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가지고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박할 뿐 가난하지 않다. (55-56쪽)

4. 몇 문장을 손글씨로 따라 쓰다 보니, 봉투에 주소를 쓰고,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쓰고, 우표를 골라 붙이고 편지를 봉하는 찬찬한 손의 움직임이 떠오른다. 신중하고 섬세하게 편지를 봉하는 일이 이렇게나 밀도 높은 일이었던가. 그녀의 일상 사이사이에서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아마 그 힘으로 그녀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오늘도, 그랬으면 좋겠다. 곧 맞이할 새로운 날도 순간이 소중한 어느 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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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새움 세계문학
버지니아 울프 지음, 여지희 옮김 / 새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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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너무 자주 '하지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 '하지만'만 말하고 있을 순 없지요.

어떻게든 문장을 끝내야 한다고, 저는 스스로를 질책했습니다. (본문 중에서, 159쪽)

 

어느 날엔가 오랜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너, 계속 '어쩔 수 없어서'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니? ... 움찔했고, 이내 마음이 아팠다. 나조차도 몰랐던, 어쩌면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아이를 낳겠다는 건 상당 부분 나의 결정이기도 했고, 실로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과정을 겪어내면서는 계속해서 '어쩔 수 없음'을 지워내기 어려웠다. '결혼했으니까 아이를 낳아야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지', '혼자는 외로워서 안돼. 둘째도 어서 낳아'하는 메시지들은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먼 곳에서도, 때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도 불쑥 불쑥 내게 날아왔다.

'저는 일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에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숱하게도 말했더랬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 말을 뱉음으로써 스스로 확인하는 데 그쳤던 것 같다. '그렇게 일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라도 일을 하면 되지! 일할 거라면서, 그 정도 리스크도 감수할 생각 안 했니?'하는 말들도 뾰족하게만 들렸다. 가정은 남편과 함께 꾸렸는데, 양육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내게만 지워지는 듯했다.

1868년 4월 5일, 혹은 1875년 11월 2일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애매한 얼굴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저녁 음식을 만들고 접시들과 컵들을 씻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세상 속으로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어떤 전기에서도 한마디도 이걸 언급하지 않습니다. ... (중략)

이 모든 한없이 흐릿한 삶들이 기록되어야 해요.

...(중략) 당신은 횃불을 손에 꽉 쥐고 저 모든 걸 탐험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영혼의 깊이와 얕음, 그 허영심과 관대함을 명확히 비추고,

당신의 아름다움 혹은 평범함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는 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돌고 도는 세상이 당신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말해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141-142쪽)

 

백 년 전의 버지니아 울프는 200페이지에 걸쳐 그런 나를 다독이고 손잡아 주었다. '여덟 아이를 기른 하녀가 10만 파운드를 버는 변호사보다 세상에 덜 가치 있는 것일까요?(본문 중에서, 64쪽)'라고 세상에 되물으며 오늘 나의 존재에 힘을 실어줬다. 사실 나는, 나를 완전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던 중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공부하고 일했는데- 그러면서 상당 부분 만족스러운 '나'로 살고 있었는데,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꺼번에 그것들이 흐릿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물리적 상황으로는 돌아가기 어려웠다.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들, 이미 생겨버린 공백은 어찌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엄마로서의 삶', '주부로서의 삶'을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평온한 상태를 애써 깨려고 하느냐고도 내게 물어온다. 내가 일을 하려는 것은 가족의 평온한 상태를 깨기 위함이 아니다. 살아있기 위함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불만족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인정받고 싶다. 즐겁게 일해 번 돈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그리고도 싶다. 나는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딸아이에게도.

 

이 책으로 위로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백 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여전히 이렇게 아프게 읽힌다는 것이 슬펐다. '그때는 그랬대'하는 여성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는 어린 나를 붙잡고, '그래도 네가 크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을 테니까'라는 가정을 종종 했더랬다. 세상은 바뀌었다. 적어도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여자라는 이유로 방해받거나 거부당한 적 없이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랐다. 하지만 그것은 임신 이전까지였다. 신나게 달려오다 갑자기 거대한 벽을 만났고, 아직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해 쩔쩔매는 중이다. 딸아이가 엄마가 될 30년 후는 다를까? ... 가만히 있어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읽고, 쓰고,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그 작은 움직임은 분명히 큰 파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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