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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당 오가와 - 오가와 이토 에세이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평점 :
1. 그녀의 소설을 좋아한다. <츠바키 문구점>도 <마리카의 장갑>도 모두 좋았다.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가 있었다. 기억에 남을만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따뜻하고 정다웠던 분위기만큼은 그 어떤 서사보다도 짙게 남아있다. 이 책 <양식당 오가와>는 그 소설들의 작가 오가와 이토가 쓴 에세이다. <츠바키 문구점>을 쓰고 있던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을 엮은 것이라고 해서, 더욱 흥미가 일었다.
2. 그녀의 소설에서처럼, 에세이에서도 정다운 시간들이 흘렀다. 추운 날에는 깊은 곳까지 따끈해지는 그라탕을, 봄이 되면 미나리를 잔뜩 넣은 샤브샤브를 혼자 있는 밤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고 와인을 마신다. 소중한 사람 펭귄(남편의 애칭이다)과 유리네(그녀와 펭귄이 키우는 강아지다)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손은 바쁘지만, 그럼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그녀 소설과 꼭 닮았다. 사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 따뜻하고 정다운 특유의 분위기가 난데없이 그녀의 손끝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을 리 없다.
<마리카의 장갑>을 읽으면서는 드물게 성실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고, <츠바키 문구점>을 읽으면서는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두 소설 모두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음을 에세이를 읽으면서 알았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오가와의 마음은, 그렇게 여기저기서 작은 빛을 냈다. 그 빛을 보고 있자니 평소 느낀 적 없는 시간의 감각을 체험하게 됐다. 특별히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닌데, 책에서 특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그날만 먹는 음식에, 그날 유독 눈에 띈 어느 장면에,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에 나까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불안하고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 요동치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니. (아무래도 나는 무장해제 당했다고 밖에.)
3. 만들고, 먹고, 만들고, 먹고, 산책하고-가 일상의 전부인 것 같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그녀는 곧 출간될 책의 교정을 보고, 글을 쓴다. 취재차 다녀온 여행도, 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도 중요한 일이었다. 베를린에서 지낸 여름은 조금 특별했는데, 그것은 그녀 부부가 매년 하는 일종의 루틴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베를린은 유리네와 함께였기 때문에 더 특별했고, 생동감 넘쳤다. 베를린에서 배변 패드를 구하기 어려워 발을 동동 구르던 소녀 감성인 그녀가 (험난해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그녀는 무엇과도 싸우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능숙했다. 어쩌면 그 재능이 제철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일과 마주하고 있다.
평소에는 피해서 지나온 '뜻대로 되지 않는 일'. 판단을 잘못하면 앞으로 인생이 장기간에 걸쳐 괴로워질 것 같다. 솔직히 지금도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괴롭지만. 그러나 이럴 때 가야 할 길의 지표가 되어준 것이 라트비아 십계명과 무히카 씨의 말이다. 어쨌든 나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걸 깨달아서 너무 좋다. (57쪽)
그녀가 내려야 할 큰 결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도 지금은 그런 순간이다. 책 속 문장 몇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조금 더 가벼운 삶을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스스로에게 제안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은 끝도 없는 욕심을 가진 사람,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가지고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박할 뿐 가난하지 않다. (55-56쪽)
4. 몇 문장을 손글씨로 따라 쓰다 보니, 봉투에 주소를 쓰고,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쓰고, 우표를 골라 붙이고 편지를 봉하는 찬찬한 손의 움직임이 떠오른다. 신중하고 섬세하게 편지를 봉하는 일이 이렇게나 밀도 높은 일이었던가. 그녀의 일상 사이사이에서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아마 그 힘으로 그녀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오늘도, 그랬으면 좋겠다. 곧 맞이할 새로운 날도 순간이 소중한 어느 날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