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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새움 세계문학
버지니아 울프 지음, 여지희 옮김 / 새움 / 2020년 4월
평점 :
저는 너무 자주 '하지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 '하지만'만 말하고 있을 순 없지요.
어떻게든 문장을 끝내야 한다고, 저는 스스로를 질책했습니다. (본문 중에서, 159쪽)
어느 날엔가 오랜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너, 계속 '어쩔 수 없어서'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니? ... 움찔했고, 이내 마음이 아팠다. 나조차도 몰랐던, 어쩌면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아이를 낳겠다는 건 상당 부분 나의 결정이기도 했고, 실로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과정을 겪어내면서는 계속해서 '어쩔 수 없음'을 지워내기 어려웠다. '결혼했으니까 아이를 낳아야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지', '혼자는 외로워서 안돼. 둘째도 어서 낳아'하는 메시지들은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먼 곳에서도, 때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도 불쑥 불쑥 내게 날아왔다.
'저는 일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에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숱하게도 말했더랬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 말을 뱉음으로써 스스로 확인하는 데 그쳤던 것 같다. '그렇게 일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라도 일을 하면 되지! 일할 거라면서, 그 정도 리스크도 감수할 생각 안 했니?'하는 말들도 뾰족하게만 들렸다. 가정은 남편과 함께 꾸렸는데, 양육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내게만 지워지는 듯했다.
1868년 4월 5일, 혹은 1875년 11월 2일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애매한 얼굴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저녁 음식을 만들고 접시들과 컵들을 씻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세상 속으로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어떤 전기에서도 한마디도 이걸 언급하지 않습니다. ... (중략)
이 모든 한없이 흐릿한 삶들이 기록되어야 해요.
...(중략) 당신은 횃불을 손에 꽉 쥐고 저 모든 걸 탐험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영혼의 깊이와 얕음, 그 허영심과 관대함을 명확히 비추고,
당신의 아름다움 혹은 평범함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는 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돌고 도는 세상이 당신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말해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141-142쪽)
백 년 전의 버지니아 울프는 200페이지에 걸쳐 그런 나를 다독이고 손잡아 주었다. '여덟 아이를 기른 하녀가 10만 파운드를 버는 변호사보다 세상에 덜 가치 있는 것일까요?(본문 중에서, 64쪽)'라고 세상에 되물으며 오늘 나의 존재에 힘을 실어줬다. 사실 나는, 나를 완전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던 중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공부하고 일했는데- 그러면서 상당 부분 만족스러운 '나'로 살고 있었는데,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꺼번에 그것들이 흐릿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물리적 상황으로는 돌아가기 어려웠다.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들, 이미 생겨버린 공백은 어찌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엄마로서의 삶', '주부로서의 삶'을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평온한 상태를 애써 깨려고 하느냐고도 내게 물어온다. 내가 일을 하려는 것은 가족의 평온한 상태를 깨기 위함이 아니다. 살아있기 위함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불만족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인정받고 싶다. 즐겁게 일해 번 돈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그리고도 싶다. 나는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딸아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