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언니가 죽었다. 슬프게도, 노라는 언니의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자였다.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언니는 위층 복도에 있었다. 몸싸움이었는지, 저항이었는지-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길게 핏자국이 나 있었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다녀가는 사이, 노라의 시야 가장자리가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캄캄해진다. 그럼에도 노라는 이 모든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장난이라면- 나중에 언니에게 어땠는지 얘기해 줘야 하니까.

거품을 내며 흐르는 구름이, 꼭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노라와 레이첼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가 언니를 죽였을까. 아니 그보다, 언니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노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만 했다. ... 레이첼과 노라는 사이좋은 자매였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던 자매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지냈다. 그런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노라로서는 상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노라는 경찰의 이야기를 다 믿을 수 없다. 오래전, 레이첼이 낯선 남자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을 때 경찰이 레이첼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첼과 친구들이 밤새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그녀의 증언은 뭉개졌고, 사건은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채 그대로 종결되었다) 노라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건을 수사해나간다. ... 흐릿했던 것들이 선명해지는 동안, 선명했던 많은 것들이 흐릿해진다. 세상 단 하나의 존재였던 언니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언니는 내가 모르는 많은 부분들을 안고 있었다. 언니가 했던 거짓말들, 노라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계획들. 그 사이에서 노라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를 특별하게 만든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깊숙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삶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노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에 그녀에게 상당 부분 감정이입했지만, 중간 어느 지점부터는 노라를 범인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화자에게 이입했다가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을 반복했던 것 역시, 이 책이 주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가, 아차-싶어 금방 손을 거둬들이고 마는 그런 마음. 동시에 차오르는 이중적인 마음은 아마도 레이첼과 노라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 느꼈을 어떤 감정과 유사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 닮고 싶다는 생각과 내가 아닌 그녀여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 노라의 그런 마음을 읽을 때마다 '아, 두 사람 자매였지'하고 흠짓흠짓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202쪽)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노라는 레이첼을 생각하게 됐다. 그녀가 자주 만났던 사람들을 만났고, 자주 갔던 곳에 가서 (자신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레이첼이 주문했을 것 같은 음식을 먹었다. 레이첼이라면 어땠을까, 그녀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들을 골랐을까.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해나가는 과정은 오로지 피해자의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수사법이자 추모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노라를 강하게 의심했음에도) 범인이 궁금하지 않아지는- 신기한 추리 소설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어도, 레이첼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은 영화를 말하는 레이첼도, 부엌에서 판 콘 토마테를 맛있게 베어먹는 그녀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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