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회사 오신 날 - 사무실에서 따라 하면 성과가 오르는 부처의 말씀들
댄 지그몬드 지음, 최영열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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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킥킥) 일단 제목이 재미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서류를, 다른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는 표지 일러스트도 흥미롭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기대 부처님이 회사에 오신다면 어떨까 잠시 상상해보았다. 과연 그는 어떤 동료가, 또 어떤 상사나 후임이 될까? ... 사실 부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하지 않았다. 약 25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부유한 삶을 버린 채 떠돌이 수도승이 되었고, 존경받는 영적 스승으로 일생을 마쳤다. 급여를 받는 일은 고사하고, 어쩌면 평생 돈을 만져보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른단다. 그런 부처가 우리의 '회사 생활'에 어떤 조언을 건넬까.



짧게 요약하자면 '올바른 생계'다. 스스로는 돈을 위한 일을 한 번도 한 적 없다만, 부처는 일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일을 해야 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온전히 수도자의 몫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올바르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올바른 생계란,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이 아닌 진정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일을 하는 것. 나에게 적합한, 건강과 정신에 이로운, 나아가 세상에 이로운 어떤 일.



사실 이렇게 쓰고 보니 진부하기 그지없다.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주의를 기울여라, 균형을 찾아라, 잘 먹고 잘 자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라, 건강한 목표를 세워라. 꼭 부처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숱하게 들어왔던 조언들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조언을 이미 오래전에 얻고도- 또 다른 조언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기 때문. 그렇다면 부처가 되기 위해 절에라도 가봐야 하는 걸까. 아니, 이 책은 우리에게 불교신자가 되기를 권하지 않는다. (부처 역시 우리가 불교신자가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다고도 쓰고 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부처가 되기를 바랄 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불교는,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을 돌보고, 깨어나는 것의 중요성을 믿는다. (이는 어느 종교를 믿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부처는 실용적이었고, 유연했으며, 긍정적이었다. 때문에 그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후 세계보다는 당장의 화살을 빼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으로, 피난처로 삼아라"고 말했다. '너 자신을 믿으라'니. 묘하게도 스스로가 조금은 단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다'.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변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한때 내 것이었던 것은 다음 순간 사라진다. 그런 신기루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본질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한때 사람을 만나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먼저 물어봤었다. 국적이나 종교, 고향 같은 것보다 훨씬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 않고, 많은 경우- 우연히, 혹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무슨 일을 하는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많은 대화를 나누어보고, 오래 겪어야 희미하게 드러난다. '진짜 나'를 만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모를 뿐, 진정한 자신을 정의하는 불변의 요소가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의 말은 몸이나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과 정신은 존재한다. 단지 그것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안에 '당신'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들을 볼 때마다 매번 조금씩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170쪽)



어쩌면 우리는 '비어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 무엇이라도 채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보다, 딱히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무엇인가를 해서 고단한 하루를 지내는 편이 '좋은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존재는 매일 무엇인가를 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자면서, 딱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어떤 생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떠오른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명상이려나. 에이 모르겠다. 일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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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세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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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환상의 동네서점>이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상주 작가' 제도에 대해 알게 됐다. 굉장히 흥미로운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또 한 명의 상주 작가를 만났다. (같은 소재, 확연하게 다른 온도차!) 소설 <인간만세>는 답십리 도서관에 상주 작가로 머무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다. 실제로 작가가 답십리 도서관에 머무르기도 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탁을 받기도 했으니 소설 속 '나'의 이야기는 허구지만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이야기 속 '나'는 도서관 내에서 진행되는 독서모임을 진행하기도 하고, 강연용 마이크를 분실하면서 '똥!'이라는 환청을 찾아 도서관을 샅샅이 뒤적여보기도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상주 작가 선정에 대해 대놓고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보냈던 진진이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달려간다. 그런데 도통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상주작가의 운명 같은 것 아닌가, 하고 짧게 상상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신나게 넘나드는 이 소설은 때때로 일기 같기도 했다가, 에세이 같기도 했다가(일기와 에세이의 범주 역시 모호하긴 하지만), 어느 순간 판타지가 되어버린다. 그 사이를 넘나드는 일이 이 소설 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여기는 중력이 없는 세계 같아) 통통 튄다는 관습적인 표현만으로는 어딘지 한참 부족한 이 이야기는 시작은 있었으나 마치 끝은 없는- 뭔가 어딘가에서(아마도 답십리 도서관에서) 여전히 진행 중일 것 같은 이야기로 툭, 끊긴다.



깔깔거리며 신나게 읽긴 했지만, 사실 나는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모순을 어찌할꼬) 플래그를 붙여둔 부분을 확인해보니 모두 소설의 리얼리즘에 관한 부분이었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만들어진 이야기라서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이야기는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았던 취향 탓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깔깔거릴 수 있었던 것은, 책이 보여주는 '현실적인' 부분이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을 때, 나머지의 판타지는 판타지로서의 매력을 더 환하게 빛내는 듯했다. (여러 가지 맛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의 기분이랄까)



언젠가는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초등학생이었고, 또 언젠가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소설만 골라 읽기도 했었던 책덕후는 이 이야기가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여서, 책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즐거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나'가 쓰고 있다고 밝힌 작품들이나, 상주 작가 공모에 떨어진 진진이 썼다는 <홍학이 된 사나이>가 진짜 있는 책이라는 것이(심지어 오한기 작가의 전작이라는 점이) 이야기를 더 맛깔나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는 감상도 곁들이고 싶다. 이 책으로 나는 오한기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전작이자 진진이 쓴 <홍학이 된 사나이>와 주인공 '나'이자 오한기 작가가 쓴 <나는 자급자족한다>도 당장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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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기쁨과 슬픔 - 너무 열심인 ‘나’를 위한 애쓰기의 기술
올리비에 푸리올 지음, 조윤진 옮김 / 다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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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집에 가든, 그 집의 개수대만 보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개수대에 설거지가 쌓여있는가 아닌가,라는 단순한 척도로 그 집 주인을 평가하는 것 같아서 상당히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 기분 나쁨의 실체는 사실 우리 집 개수대에 (지금도)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모름지기 설거지란, 물에 불려두면 훨씬 쉽게 할 수 있고- 컵 두어 개를 씻는 것과 거기에 식기 너덧개가 더해진 것 사이에는 크게 설거지를 하는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설거지는 그때그때 해야 한다는 거죠?



베짱이를 경멸하고 개미를 본받으라고 배운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전전긍긍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나, '오늘만 산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동시에 '코인'과 '주식'에 용돈과 월급을 밀어 넣고 전전긍긍하는 것도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말로는 오늘만 살면서, 실은 모두 내일을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계발서는 오늘도 불티나게 팔린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유명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그 가운데 횡횡하는 '1만 시간을 투자해 보라'던지, '간절히 원하라'든지 하는 말은 그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는 화살로 돌아온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 <노력의 기쁨과 슬픔>은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오늘 밤에는 기필코 10시 전에 아이를 재우겠어!'라고 백만 번 되뇌어 봐야, 아이는 잠들지 않는다. '내일부터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스페인어 공부를 해야지!'하는 목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10시 이전에 자는 것,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것은 아주 허무맹랑한 목표는 아니다.(할 수도 있겠지)(그랬던 날도 있고) 하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은 이 목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는' 나를 만들지 않고(또는 그것을 '해야 하는' 나를 만들지 않고) 목표만 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에 만족하면 돼. 나무는 열매를 맺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잖아. 누가 그 열매를 먹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이야. 감사 받으려고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좋으니까 주는 거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유지해야 해.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지 마. 자유롭게 행동하며 철저히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더 좋은 전략이 될 거란 뜻이야. 최소한 나 자신의 모습을 지킬 수는 있을 테니까. 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꼭 사람을 향하지만은 않잖아. 사람을 사랑할 땐 언제나 상호성이 문제가 되니, 사람 대신 이런저런 것들, 이런저런 활동들을 사랑할 수도 있을 거야. 산책, 달리기, 수영, 독서, 요리 같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겠지. 그림, 음악, 자연을 사랑할 수도 있을 테고. 자기가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 주변의 상황이나 최종적인 목표를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감정에 빠지기 때문에 그 일을 잘할 수밖에 없게 돼. 신기하게도 나 자신이 다른 것에 완전히 빠져 있을 때 내 모습이 가장 빛나는 거지. 어떤 모순인지 알겠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눈앞의 일에만 열정적으로 몰입할 만큼 무언가에 푹 빠지면, 효율이 높아질 뿐 아니라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게 돼.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잊고 마치 아무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 비로소 가장 나다워지는 거야."


"이번에도 그 얘기네요.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이룰 수 있다는..."


"맞아. 사랑에 있어서는 그 효과가 특히 두드러져. '목표'는 자신이 목표물이 되었음을 아는 순간 다르게 행동하거든. 만약 목표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 목표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 거야." (본문 중에서, 217-218쪽)



목표를 세우지 말라니! 세상만사에 호기심으로 가득한 나로서는 쉬이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관심의 폭을 넓히고 쉽게 새로운 일에 빠져들었다가 또 쉽게 식기도 하는 나였다.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야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는 아무 곳에도 닿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꾸준히 하고자 '목표'로 삼았던 것들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냥 하던 것, 목표도 무엇도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 내게도 있었다. 예컨대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는 것, 메모하는 것. 아무 생각 없이 이어오던 어떤 행동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는- 아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와,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하는 지인의 감탄에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하고 무심하게 대답할 수 있는 그것. 바로 그것이 오늘의 당신이며, 그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이 책은, 매사에 너무 열심인 우리에게 '노력의 쓸모없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은 태도와 상상, 그리고 전치사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맞서거나, 그 안에 푹 빠졌거나, 위에 올라타거나, 함께하거나. 물론- 긴장하거나, 애쓰거나, 경쟁할 수도 있겠지만- 긴장을 내려놓고 받아들이고 굴복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조금 내려놓는다면- 삶은 스스로 정렬될 것이며,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이게, 오늘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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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저편은 차고 깊다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히가시 마사오 엮음, 마치다 나오코 그림, 김수정 옮김 / 필무렵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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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가 시골에서 지내기로 했나 봅니다. 아마도 도시에서 살고 있을 이 아이는- 풀, 돌, 꽃, 새, 나무, 벌레와 물고기까지 모두 저를 환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여긴 뭐 아무것도 없구나.'하는 심드렁한 표정이네요. 아무래도 원치 않았던 일정인가 봐요. 그래도 아이는 시골 생활에 적응해갑니다. 무엇보다 강이 있다는 게 반가웠던 것 같아요. 강은 맑아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당연히, 아이는 들어가 보고 싶었겠죠. 그런데, 강가에 서서 뒤돌아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입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할아버지 댁에 들어서는 길, 아이는 '사박사박사박사박'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출처를 알기 힘든 낯선 소리였어요. 그 소리는 밤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누구의 발자국 소리일까요?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일까요? 아이는 그 소리가 강 깊은 곳에서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산에서는 원래 이런저런 소리가 나는 법이지."

"사박사박사박하는 소리도요?"

"아, 그건 요괴가 팥 씻는 소리야."

"요괴가 팥을 씻는다고요?"

"그래, 그런 요괴가 있어. 강에서 팥을 알알이 세며 씻는 거란다."

"왜요?"

"글쎄다. 아무튼 그 소리가 들리면 깊은 못으로 밀려 빠진대."


아이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꽤 열심히 배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강에서의 수영도 자신 있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수영장과 강은 다르다고, 물살이 세고 못이 깊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못'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아이는 매일같이 강을 바라보며, '못'은 어떤 곳인지- 정말 그렇게나 깊고 차가운 곳인지 호기심을 쌓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호기심이 '요괴'이야기가 가져다준 두려움을 이겨버린 것 같아요. 요괴 따위 없으니까 조심하면 되지 뭐. 하는 아이의 호기로움은 결국, 아이를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요괴였는지- 못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요. 그래서, 여섯 살 난 꼬맹이는 울어버렸습니다. 강가에 남겨진 신발 한 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나 봐요. 아이를 달래며 '강은 수영장이랑은 달라. 강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때때로 물은 아주 빠르게 흘러서 우리가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잖아.'하고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했던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어요. 그림책 속 친구가 '요괴 따위 없으니까 조심하면 되지 뭐'하고 강으로 한발 한 발 내디딜 때,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겠죠.


보통의 그림책에서라면, 할아버지가 강으로 달려와 아이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위기를 겪고 난 아이는 다시는 강에 들어가지 않겠노라며 할아버지와 굳은 약속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자연의 거대함을 배웠겠죠. 하지만 이 책은 애써 운명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그렇게 될 뿐이라는 식이예요. 아무리 반대 방향으로 물을 퍼올려도, 강물은 끝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니까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왠지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들어왔던 백가지 전설(?)들이 떠올랐어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학교의 밤'에 대한 호기심과 학교에 대한 동경, 운동장에 쌓인 시간들- 그런 것들이 뒤엉킨 결과물일 테지요. 과학이 눈부시게 빛나는 오늘이지만, 옛날 어느 때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있었을 겁니다. 원인과 결과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일은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이 더 크게 작용할 때도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책 뒤표지의 할아버지의 개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합니다. 깊고 슬픈 개의 눈동자가 앞표지의 아이와 겹쳐 보이는 건, 저 뿐만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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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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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다른 세계에서도>에는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의 폭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책을 덮었을 때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기 적힌 이야기들이 얼마나 다양한 사회적, 시대적 맥락을 지니는지- 우리와 다른, 하지만 다를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에 왜 귀 귀울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한참을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다가, 그냥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오래전 자신과 어머니를 두고 동성 연인과 떠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자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마는 의사인 '나', 낙태법 폐지에 찬성하는 언니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위해 임신을 선택한 동생, 80년 5월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정혜와 항상 프랑크푸르트로 떠나고 싶다던 간호보조원 언니, 산업재해 현장에 있었던 우재와 그의 집에 들어가 살았던 희곤, 신종 바이러스를 알아차린 탈북민 출신의 의사와 관성으로 그의 말을 무시한 한국의 의사인 나. 그들은, 또 그들의 이야기는 때로 너무 멀어서-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쉬이 보이지 않았다.



보호의 문제, 동성애, 산업재해, 낙태죄, 북한. 이야기가 택한 키워드는 하나같이 묵직하다. 표제작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낙태법 폐지에 찬성하는 목소리에 힘을 싣다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위해 임신했다는 동생을 바라보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도 완강하게 가지기 어려워진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마주하는 대개의 문제들이 이런 식이었다. 어느 한쪽에 마음 편하게 서 있기 어려웠다. 오른쪽도, 왼쪽도 모두 자기 자리에 진심이었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틀렸다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어정쩡한 자세로 '그러게, 네 말도 맞긴 한데...'의 입장만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대로도 괜찮은 걸까. 어느 한쪽이 완전하게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어떤 입장도 가지지 않은 채로 지내는 것 말이다. (그래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 분명히 변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여덟 개의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 전하는 '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 그게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인지, 어떤 책이나 기사를 읽었고, 누구와 만나 이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나가는 동안 이야기 속 인물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내게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모든 게 그냥 '소설'인 것만은 아니라고. 이렇게라도 해서 네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노라고,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야 더 이상 픽션일 수 없는 이 이야기들은 한참을 나를 어지럽게 했다. 그것은 마치 그동안 나의 삶이 얼마나 비겁했던가를 비추는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수야."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본문 중에서, 57쪽)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 살고 싶다. 항상 옳은 선택, 멋진 선택만을 할 수는 없겠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야 적어도-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에 낙담을 느끼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시대를 사는 나와 그대,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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