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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저편은 차고 깊다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히가시 마사오 엮음, 마치다 나오코 그림, 김수정 옮김 / 필무렵 / 2021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가 시골에서 지내기로 했나 봅니다. 아마도 도시에서 살고 있을 이 아이는- 풀, 돌, 꽃, 새, 나무, 벌레와 물고기까지 모두 저를 환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여긴 뭐 아무것도 없구나.'하는 심드렁한 표정이네요. 아무래도 원치 않았던 일정인가 봐요. 그래도 아이는 시골 생활에 적응해갑니다. 무엇보다 강이 있다는 게 반가웠던 것 같아요. 강은 맑아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당연히, 아이는 들어가 보고 싶었겠죠. 그런데, 강가에 서서 뒤돌아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입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할아버지 댁에 들어서는 길, 아이는 '사박사박사박사박'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출처를 알기 힘든 낯선 소리였어요. 그 소리는 밤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누구의 발자국 소리일까요?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일까요? 아이는 그 소리가 강 깊은 곳에서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산에서는 원래 이런저런 소리가 나는 법이지."
"사박사박사박하는 소리도요?"
"아, 그건 요괴가 팥 씻는 소리야."
"요괴가 팥을 씻는다고요?"
"그래, 그런 요괴가 있어. 강에서 팥을 알알이 세며 씻는 거란다."
"왜요?"
"글쎄다. 아무튼 그 소리가 들리면 깊은 못으로 밀려 빠진대."
아이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꽤 열심히 배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강에서의 수영도 자신 있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수영장과 강은 다르다고, 물살이 세고 못이 깊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못'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아이는 매일같이 강을 바라보며, '못'은 어떤 곳인지- 정말 그렇게나 깊고 차가운 곳인지 호기심을 쌓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호기심이 '요괴'이야기가 가져다준 두려움을 이겨버린 것 같아요. 요괴 따위 없으니까 조심하면 되지 뭐. 하는 아이의 호기로움은 결국, 아이를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요괴였는지- 못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요. 그래서, 여섯 살 난 꼬맹이는 울어버렸습니다. 강가에 남겨진 신발 한 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나 봐요. 아이를 달래며 '강은 수영장이랑은 달라. 강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때때로 물은 아주 빠르게 흘러서 우리가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잖아.'하고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했던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어요. 그림책 속 친구가 '요괴 따위 없으니까 조심하면 되지 뭐'하고 강으로 한발 한 발 내디딜 때,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겠죠.
보통의 그림책에서라면, 할아버지가 강으로 달려와 아이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위기를 겪고 난 아이는 다시는 강에 들어가지 않겠노라며 할아버지와 굳은 약속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자연의 거대함을 배웠겠죠. 하지만 이 책은 애써 운명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그렇게 될 뿐이라는 식이예요. 아무리 반대 방향으로 물을 퍼올려도, 강물은 끝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니까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왠지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들어왔던 백가지 전설(?)들이 떠올랐어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학교의 밤'에 대한 호기심과 학교에 대한 동경, 운동장에 쌓인 시간들- 그런 것들이 뒤엉킨 결과물일 테지요. 과학이 눈부시게 빛나는 오늘이지만, 옛날 어느 때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있었을 겁니다. 원인과 결과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일은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이 더 크게 작용할 때도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책 뒤표지의 할아버지의 개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합니다. 깊고 슬픈 개의 눈동자가 앞표지의 아이와 겹쳐 보이는 건, 저 뿐만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