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끝나자 남자는 웃통을 벗고 몸을 씻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심호흡을 했다. 땀과 먼지때문에 물에 젖은 늙은 호박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민들레 씨앗처럼 흩날리는 오리털들을 바라보고, 다시 웃통을 벗은 기사의 중력을 견디지 못하는 피부들을 바라보고, 다시 심호흡을 하고... 하지만 호흡하는 내내 몸속으로 들어왔던 저 민들레 씨앗들은 이번달에도 내 방과 몸 속에서 꽃이 되어주겠지.
집에선 가지를 심고 있었다. 나는 가시오가피 주문을 처리하고 이발을 하러 갔다. 가시오가피 대금을 뽑아서 이발을 한 후, 폐업 비디오가게에 가서 오래전에 관심을 끌었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골랐다. 주인장과 살짝 매니아틱한 대화를 했더니 테잎 세 개를 4000원에 해결해 주었다. 아마 시간만 더 있었고 엄마가 말해준 목록들이 없었더라면 좀더 많이, 좀더 저렴하게 서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서둘러 신발가게로 가서 엄마가 말해준 만원짜리 운동화를 샀다. 서둘러 마트에 가서 엄마가 말해준 장을 보았다. 마늘 천 얼마어치, 양파 네 개, 흙 당근 두 개, 짜장 가루 천 얼마어치, 벽돌보다 조금 작은 두부 한 모. 를 사가지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하루가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집에선 여전히 가지를 심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씌우는 작업을 돕고 나니 두통스런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나의 두통은 어떠냐면 머리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랑 비슷하다. 이마 주위는 실제로 부글대서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 정말로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대고 있는 거다. 그러고보니 26일 동안 두통약을 삼키지 않았었다. 진료소에서 지어준 두통약은 주황색 무엇, 감색 무엇, 그리고 흰색 타이레놀 이렇게 세 알인데 위력이 참 대단하다. 어쩔땐 너무 대단해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약기운이 입안까지 퍼져서 심하면 20일 넘게 입 안이 얼얼하다. 물론 약을 먹고 한 시간 지난 후가 제일 얼얼하다. 바로 지금처럼 제일 얼얼하다. 근데 대체 두통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두통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벌써 두통스러워지는 것 같잖아. 마치 새벽이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아련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