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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부터 정말이지 나는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늦은 밤까지 교회에 있다보면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진다. 무슨 소리가 들릴때마다 이것이 누구의 소리인지 추측하게 된다. 10시가 조금 넘자 나는 조금전 들렸던 소리가 누구의 발소라인지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날도 추워지니 이제 밤에는 유아실에 있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문자를 보내셨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갈 것을 알게된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편지를 써야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 날이 오지 않길 바랬지만 결국 오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지 않길 바랬다. 오지 않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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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가 힘들다. 숨쉬기가 편한 곳은 교회 유아실 밖에 없다. 무조건 편지를 써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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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하루에 대부분을 교회 유아실에서 보내고 있다. 유아실엔 커튼이 있고, 선풍기가 있고, 방석이 있고, 베개가 있고, 이불이 있고, 고요함이 있다. 베개와 이불만 빼면 모두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들이다. 갈 때마다 책을 한 권씩 들고가지만 사실은 잠을 잘 때가 더 많다. 아침이 끝나기 전에 잠들어 저녁이 시작되기 전에 잠에서 나온다. 그러고나면 불안했던 하루가 흘러간 게 뿌듯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즐거워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우물 속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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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서 중반쯤에 나온 미국 영화들 특유의 유화처럼 부드럽고 안개처럼 희미한 화면톤 속에서 햇살이 재즈스러워져 갈 무렵 킴 베이싱어가 한쪽 눈을 가린 특유의 헤어스타일로 가로수 사이를 달려가고 있고 한쪽에선 데이빗 듀쇼브니 같은 남자가 사이드 라인이 무지개 곡선인 자동차 안에서 중절모를 쓰고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으며 서서히 가로등들이 아직은 졸린 것처럼 켜지기 시작할 때 어디에선가 BJORK의 ISOBEL 이 들려오는 그런... 

말하자면, 그런 나른하고 긴장되며 불안하고 설레이는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은 이번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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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끝나자 남자는 웃통을 벗고 몸을 씻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심호흡을 했다. 땀과 먼지때문에 물에 젖은 늙은 호박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민들레 씨앗처럼 흩날리는 오리털들을 바라보고, 다시 웃통을 벗은 기사의 중력을 견디지 못하는 피부들을 바라보고, 다시 심호흡을 하고... 하지만 호흡하는 내내 몸속으로 들어왔던 저 민들레 씨앗들은 이번달에도 내 방과 몸 속에서 꽃이 되어주겠지.

집에선 가지를 심고 있었다. 나는 가시오가피 주문을 처리하고 이발을 하러 갔다. 가시오가피 대금을 뽑아서 이발을 한 후, 폐업 비디오가게에 가서 오래전에 관심을 끌었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골랐다. 주인장과 살짝 매니아틱한 대화를 했더니 테잎 세 개를 4000원에 해결해 주었다. 아마 시간만 더 있었고 엄마가 말해준 목록들이 없었더라면 좀더 많이, 좀더 저렴하게 서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서둘러 신발가게로 가서 엄마가 말해준 만원짜리 운동화를 샀다. 서둘러 마트에 가서 엄마가 말해준 장을 보았다. 마늘 천 얼마어치, 양파 네 개, 흙 당근 두 개, 짜장 가루 천 얼마어치, 벽돌보다 조금 작은 두부 한 모. 를 사가지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하루가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집에선 여전히 가지를 심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씌우는 작업을 돕고 나니 두통스런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나의 두통은 어떠냐면 머리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랑 비슷하다. 이마 주위는 실제로 부글대서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 정말로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대고 있는 거다. 그러고보니 26일 동안 두통약을 삼키지 않았었다. 진료소에서 지어준 두통약은 주황색 무엇, 감색 무엇, 그리고 흰색 타이레놀 이렇게 세 알인데 위력이 참 대단하다. 어쩔땐 너무 대단해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약기운이 입안까지 퍼져서 심하면 20일 넘게 입 안이 얼얼하다. 물론 약을 먹고 한 시간 지난 후가 제일 얼얼하다. 바로 지금처럼 제일 얼얼하다. 근데 대체 두통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두통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벌써 두통스러워지는 것 같잖아. 마치 새벽이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아련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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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한마리가 엄마에게 잡혔다. 장끼를 눈 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역시 대단했다. 모든 것이 인디언 추장처럼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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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의낮잠 2008-04-22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다리기 할 때 사용하는 줄처럼 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