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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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주일 동안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불편하고 답답하고 부끄럽고 속상하고 화나는 등의 여러 감정이 엉켜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108쪽)

나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하는데, 적절한 대응을 못할 때마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는 논리나 지식과 같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따로 공부해야 하는 문제"(108쪽)

라니 위안이 되면서도, 그저 나 하나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이니 답답하다.

 

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일주일 내내 내 머릿속엔 온갖 억울했던 일들과 대응할 말들, 행동들 같은 게 떠올랐다.

그러다 이틀 전 밤에 남편에게

"여성이 약자라고 생각해?"

라고 물었다.

"아니. 뭐, 물리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약자야?"

헐.

 

나: "그럼 장애인은?"

남편: "어떤 면에서는."

나: "그럼 어린이는?"

남편: "어린이는 약자지."

나: "왜?"

남편: "어린이는 어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이 망가지기 쉽고, (이하 생략)"

나: (... ...)

남편: "(....내 눈치를 보며) 왜, 아니야?"

나: "하아......"

 

내가 결혼생활을 답답하고 힘들게 느끼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짜증나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 내가 왜 약자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약자라는 증거야."

남편: "응?"

나: "그런 거 몰라도 불편한 거 없이 잘 사는 게 권력 아니야? 기득권을 갖고 있으면 뭐가 불편해서 그걸 매사 공부하고 설명하고 극복하고 바꾸려고 하겠냐고.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으니까 모르고도 잘 지냈겠지. 오히려 알려고 하는 게 더 수고롭고 거슬리니까 알려고 하지 않는 거 아닌가."

남편: "(....)"

나: "아니야?"

남편: "(비장한 어조로)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나: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남편: "....."

 

그럼에도 남편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또 이상한 책 읽고 히스테리 부리는구나'하는 표정.

 

정말이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을 수 있는 게 권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게 권력이지.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 자체가 내가 가진 알량한 권력을 드러내는 건 아니었는지.

그래서 누군가는 불편하고 억울하고 상처받지 않았는지.

나의 생각없는 말이 누군가를 멋대로 규정하거나 없는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보면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랄까.

나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유연하고 유용한 틀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남편은 그날 밤 대화를 잊어버린 것 같다.

여전히 그날 밤 어떻게 말했어야 더 좋았을까를 생각하는 나는 약자가 아니고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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