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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저자가 지방대 대학원생으로서, 시간강사로서 어떤 삶을 살아내고 또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담담하게 쓴 글이다. 노동자로서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시급과 처우를 받고 있는 대학의 비정규 노동자들―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엔 분노하기 일쑤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엔 분노보다 슬픔이 밀려왔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도 안다. 관행은 거스르기 힘들고, 다수가 침묵하며 따르는 일에는 반발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의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기 힘들며, 게다가 여러 사회적․도덕적 관습들 때문에 ‘서열’을 거스르는 언행도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을’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따르는 저자가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지만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든 ‘을’의 위치에 서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니 적어도 관행을 거스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저마다 학교, 특히 대학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자주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 중 하나는, ‘대학이 어떤 곳인가(무엇을 하는 곳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교수들은 종종 대학이 ‘진리의 전당’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그렇다면 교수와 학생들은 진리 즉, 학문을 치열하게 추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취업에 필요한 지식만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인문학 강의에서는 ‘정의’, ‘공정’, ‘인권’, ‘성찰’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지만 막상 그것을 말하고 추구하는 대학에서도 비정규직은 넘쳤고, 시간강사뿐만 아니라 근로 장학생이나 조교들의 처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교수, 교직원은 거의 없었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또 하나의 기업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저자가 자신의 “꿈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다소 부당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혹은 허울만 좋은 '꿈'을 위해 그렇게 사느니 당장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게 현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게 최선인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그러한 생각들이 저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네가 선택했으니 참고 견디렴. 못 하겠으면 떠나든가.”라는 논리는 대학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폭력적이지 않은가. 어떠한 선택이든 최소한의 생활 유지는 되어야 하고, 인간 대접은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화가 나는 것은 “네 주제를 알라”는 논리다. 맞다. 어떤 점에서 주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생존(생계유지)은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문제다. 하지만 주제 파악이 모든 가치판단과 선택의 유일한 잣대일까? 주제 파악의 그 '주제'라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 능력을 말하는 것인가?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주제에 맞게’ 공부보다 취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공부는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만 해야 하나?
저자의 말처럼 책에 등장하는 모든 ‘문제적인’ 상황들은 특정한 개인이 나빠서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면 구조를 바꿔야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제2, 제3의 309동1201호가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구조는 바뀌기 힘들다. 때문에 개인이 현실과 타협하는 편이 빠르고 편하다. 하지만 그런 타협적인 개인만 있다면 구조는 더욱 바뀌지 않을 것이고, 개인의 삶을 ‘주제 파악’의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모든 을들의 삶이 더욱 힘겨워질 것이다.
얘기가 거창하게 흘렀지만, 저자는 자신이 겪고 생각한 바를 담담히 글로 옮겼을 뿐 구조개혁을 주장하거나 특정한 개인의 태도를 지적하며 문제 삼지는 않는다. 나는 저자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슬펐다. 차라리 대학의 부조리한 측면을 하나하나 따지는 글이었다면 덜 서글펐을 것이다. 저자는 이 글을 “내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 나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15쪽)고 했다. 그것이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슬펐던 지점이다. 저자의 경험이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또한 더 과장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은, 이 시대의 대학과 젊은이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지방시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는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아이에게는 어떤 삶과 길을 보여주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려운 문제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