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보수시대 - 미처 몰랐던 징후들
신기주 지음 / 마티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 전체가 보수화 혹은 우경화 되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일베현상이나 종편의 활약(?), 최근 대선과 총선 및 재보궐선거 결과 등이 그 예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예전에 비해 얼마나 보수화 된 것인지, 예전에도 보수적이었는데 더 보수적이라는 건지, 아니면 예전엔 그렇지 않았으나 지금은 보수적으로 되고 있다는 건지 잘 판단이 안 된다.

 

어느 사회나 보수 세력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보수의 반대를 진보라 할 때, 보수와 진보가 얼마만큼의 균형을 이루어야 보수화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을까?

사회의 보수적인 부분(성향)은 항상 있어 왔는데 드러난 몇 가지 현상만으로 보수화를 논할 수 있을까?

물론 보수화의 징후에 관한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란 말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 되었느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이유 같은 것들이 아닐까.

 

 

<월간 인물과사상>에서 인터뷰어로 자주 등장했던(최근 몇 개월은 계속 등장했다) 신기주의 책 <장기 보수 시대>는 '미처 몰랐던 징후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한국 사회가 장기 보수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징후를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꼼꼼히 짚어주고 그것의 의미와 영향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책이리라 기대했다.

더구나 '미처 몰랐던' 것을 알려준다는 솔깃한 수식어까지 붙어있으니.

 

저자는 장기 보수화의 징후를 경제(시장), 사회(좁은 의미의 사회 또는 신문지면의 '사회' 정도), 미디어, 정치라는 네 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각 국면마다 5~8가지 소주제로 징후들을 실었다.

 

책의 내용을 가름하는 큰 틀이 경제, 사회, 미디어, 정치인 이유가 있다.

그 네 가지가 서로 얽히고설켜서 돌아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보수화니 민주화니 하는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즉, 그 네 가지 국면에서 드러난 징후들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가 장기 보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때 미시적으로 드러난 징후들은 '보수화'라는 거시적 흐름에 따라서 앞으로도 펼쳐지고 심화될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여기서 의문은 '보수'라는 말 자체다.

보수, 혁신, 진보, 좌파, 우파…. 

꽤 자주 접하는 단어들인데도 그 의미,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흐릿한 느낌이다.

보수(保守).

한자를 보면 보존하고 지킨다는 뜻인 듯하고, 국어사전을 보면 새로운 것에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을 중요하게 여겨 그걸 유지하려는 것이라 한다.

 

내 느낌에 '보수'는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당연한가?!)

'유지'라는 것의 본질은 계급 혹은 권력 문제라는 느낌적인 느낌.

권력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판을 짜고 룰을 정하는 힘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수(세력)가 전통을 유지하려는 이유는 결국 지금껏 누려오던 기득권, 우위 등을 지키기 위해서다.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인 이유도 살아온 관성 때문인데, 이미 오랜 기간 익숙해진 룰을 바꿔 버린다면 혼란스러울 뿐더러 새로운 룰에 따라서 우위를 점하기도 힘들다.

거기다 살아온 기간만큼 후배(후세대)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보수화'에 한몫 한 것은 아닐까.

 

'장기 보수 시대'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단 말이다.'(6쪽)

저자는 정치적 민주화(87년 체제)와 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회에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보수화의 징후라 말한다.

 

개인화된 사람들은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 피해자'다.

개인은 자신이 능력과 열정만 있으면(열심히 하면) 성공할 것이라 기대한다.

교육기관은 사회적 리더(공적인 책임감이 있는 리더)를 기르기보다 기업의 입맛에 맞는, 혹은 개인의 출세만 생각하는 인재를 양산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가족부양의 책임 때문에 서로 연대하지 못한다.

자본(시장)과 정부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기에 개인들의 연대를 싫어한다.

그래서 미디어를 통제하고, 개인들을 통제한다.

정치권은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뛰어들지 않는다.

게다가 권력 구조의 모순으로 정치적 힘을 낭비한다.

이 상황에서 개인들은 각자 살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이자 개인의 책임이 된다.

 

이런 모습들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보수화라는 커다란 흐름을 만든다.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으나, 만약 문제의식을 가진다면(그러니 저자도 책을 썼겠지만)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새로운 판을 짜고 새로운 룰을 만드는 것이 방법일까?

실제로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체 게바라와 쿠바, 68혁명 등을 이야기하며 한국 사회에도 문화혁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덧붙인다.

자본주의를 성숙시키는 문화적 혁명이란 게 어떤 것인지는 불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저자는 혁명의 가능성이 있어야만 체제가 가진 모순도 해결하고 사회도 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획기적인 혁명 또는 혁신도 시간이 지나면 자체적인 모순과 갈등을 낳게 된다.

그래서 혁명을 통해 주기적으로 체제를 초기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만으로도 체제는 모순과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할 방도를 모색한다.(그래야 체제 안에서의 기득권이 유지되므로)

혁명의 가능성은 체제 발전의 필수 요소인 것이다.

 

사회 발전을 위한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는 정치(력)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 생각하는 것 같다.

개인들이 '군중'이 아니라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홉스의 시민이 아니라 로크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시민은 정부에게 통치를 신탁하는 계약을 맺었을 뿐이다.

정부를 감시·감독하다가 제대로 안 하면 위임했던 권리를 다시 받아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과 정부, 미디어의 선동과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고, 필요하면 연대해서 대응해야 한다.

 

정치(력)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한다.

정치가 매우 먼 이야기인 줄 알았던 나도 언제부터인가 관심을 좀 갖게 되었는데, 짐작했던 것보다는 내 삶이 정치와 관련이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처에 서점은커녕 변변한 도서관도 하나 없어서, 나는 대도시로 나가거나 온라인 서점을 통해 (직접 살피지도 못하고) 책을 구입해야 한다.

지역에서 주민의 문화지식 인프라 구축(혹은 복지)에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무엇 무엇을 유치해서 일자리를 몇백개인지 몇천개인지 만든다고 하더니, 지역 실업률이 줄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 건설 허가는 왜 그렇게 잘 내주는지 공사장 소음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덕분에 대도시의 투기자본이 우리 동네로도 몰렸는지 우리집을 비롯한 주변 집값이 불과 1년도 안 되어서 두 배로 올랐다.

그런데 집은 1년 전보다 딱 그 기간만큼 더 낡은 것을 제외하면 똑같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다. 

담배값 오른 것도 짜증나는데, 모든 술집에서 금연이라니.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못해 화나는 게 아니다. 

흡연자를 야만인 보듯 몰고가는 분위기에 몸서리가 쳐진다.

금리는 자꾸 낮아져서 나만을 위한 혜택을 준다는(빚쟁이가 되라는/대출) 전화, 문자, 메일, 전단지가 날마다 몇 통씩 온다.

 …

이 모든 것들이 예전에는 별 관심 없었거나 혹은 그러려니 했던 일들이다.

개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안 보이던 게 보이고, 군중에서 '시민'으로 탈바꿈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기 보수의 징후들 중 특징적인 것들을 뽑아 요모조모 살핀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다른 시기,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일들을 네 가지 국면으로 분류해서 '보수화'라는 큰 흐름으로 엮어 논의를 전개한 점도 유용했다.

물론 보수화 논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나왔다면 획기적이었을 테지만 조금 뒤늦은 감이 있어 아쉽다.

 

단점도 몇 가지 있다.

우선 단문이 많고 접속사가 거의 없어서 끊어 읽는 듯한 느낌이 불편했다.

게다가 어려운 단어(전문용어인가)와 전후사정을 밝히지 않은 사건들이 등장해서 일일이 검색해야 했다.

추론(논증?, 논의?)과정이 너무 비약적이라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사회는 여전히 상명하복과 예의만 중시하고 열린 사고를 하지 못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그 증거다."(242쪽)

라는 부분이다.

나는 일본인이 열린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왜 후쿠시마 원전 사태인지를 진짜 모르겠다.

이것처럼 대체적인 내용과 흐름은 이해가 되어도 중간 중간 등장하는 사건(혹은 인물)들이 심하게 압축 제시되어 있어서, 읽고도 덜 읽은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준다는 점이 단점이다.

물론 평소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등에 관심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읽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