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후, 예상 밖의 일이라든가 뜻하지 않았던 일들을 자주 겪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아침형 인간' 비슷하게 되었다는 거다.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어김없이 눈을 뜬다. 알람 없이 그 시간에 눈을 뜬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뭘 하지?(뭘 해야 하지?)'와 함께 '오늘은 무슨 책을 읽지?', '오늘은 뭘 먹지?'를 아주 잠깐 생각한다.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30분 남짓 여유가 있기 때문에, 후다닥 생각하고 책을 펼친다. 정말이지 느긋하게 읽을 책을 고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물론, 아이가 깨어 있어도 각자의 일을 꾸리는 편이긴 하나, 글쎄…. 좀 집중할라치면 "엄마, 이건 머야(뭐야)?"를 연발하고, 한창 몰입했을 때 "엄마 가치(같이 하자)!"를 외치기 때문에, 과연 그 모든 난관을 헤쳐가면서까지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옳은가, 하는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거다. 아이는 잠들고 나는 깨어있는 시간이 내겐 황금 시간대다. 오늘 아침엔 모지스 할머니의 책을 펼쳤다.

 

글씨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이라서 빨리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림을 유심히 살피다가 온갖 상상과 회상을 거듭하는 바람에 정작 글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옛날엔 참 좋았는데" 하는 뭐 그런 얘기들이었지 싶다. 옛날엔 사람들이 모두 느리게 살았고, 그래서 삶의 면면을 더 즐겼노라, 하는 얘기.

 

그림은 뭐랄까,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저기 저 마을에서 사람들은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아이들은 뭘 하고 놀았을까, 뭘 먹었을까, 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쉬면 참 좋겠다, 저 언덕을 넘으면 어떤 풍경이 있을까…. 역사적인 순간(역사책에 등장할 법한)을 담은 그림도 몇 점 있었는데, 책에 실린 그림 중에서 흑인이 등장하는 그림은 한 점뿐이었다. 낡고 허름한 집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오전 틈틈이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감상한 후, 점심을 먹고서 오후에 아이의 낮잠 시간 동안 읽을 책을 골랐다.

'아무튼,' 시리즈를 몇 권 읽었는데 최근에는 이 책이 나왔길래 구입했다.(이 시리즈 중에서는 <아무튼, 피트니스>가 정말 재밌었다.) 제목만 보고 '닥치고 외국어 공부하라는 건가' 혹은 '외국어 공부의 비결이 담겨 있나' 하고 어림 반푼어치쯤은 있을 법한 짐작을 했었다.

관심이 많지만 열심히는 하지 않는 이 꾸준함은 또 뭘까 싶지만, 습관적인 게으름 속에서도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 집요한 미련에 대해서, 이제라도 인정을 해보자는 차원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책을 쓴다. (11쪽)

첫 다섯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내 짐작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러나 짐작과는 다른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로웠고 재미있었고 즐거웠고, 아무튼 그랬다. 그 이야기들의 용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큰 지장이 없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외국어를 잘 하는 것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다. 여기서 '외국어를 잘 하는 것'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고'가 별 무리 없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한국어에는 없는 개념이나 표현을 알고 싶을 때, 근사한 책이나 영화를 원서(원어)로 보고 싶을 때, 그 나라 사람이 하는 강의를 직접 듣고 싶을 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알아채고 싶을 때 등등. 한마디로 뭔가를 '생생하고 세세하게 느끼고 싶어서' 외국어를 잘 하고 싶었다. 동경을 품긴 했으나 어이없게도, 실제로 외국어를 '잘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공부할 언어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선택 장애를 겪었고, 교재나 학원비 같은 것도 비싸게 느껴졌고,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는 외국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절실함이 없었다. 이거 공부해서 뭐 하나, 한국어나 잘 하자…, 막상 한국어도 그저 그렇다.

 

아무튼, '아무튼, 외국어'는 이런 내게 웃음과 위안을 주었다. 엉뚱하게도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허튼 열망이 되살아났는데, 며칠 지나도 계속 이런 마음이면 뭔가 하나 공부해 볼까 싶기도 하다. 그 시도가 또 '그냥 한국어나 잘 하자'로 귀결되더라도 크게 상심하지는 말아야지. 아마도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위안의 용도가 있지 않나 싶다.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 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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