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내가 너를 사랑한 게 죄다. 씨팔”
아이들도 놀지 않는 골목길
벽 아래 서서
한참을 들여다 보다
시가 되지 못할
답장만 새기고 왔다
“아니 더 사랑하지 못한 게 죄다. 쓰바”
--- 몇 일 전 서울의 한 변두리 동네를 은근슬쩍 다녀왔습니다. 가끔 마실가는 정말 작은 헌 책방에 들러 책 몇 권을 사고는 지하철 역 주변에서 그냥 10번이라고 적힌 초록색 마을 버스를 타버렸습니다. 버스는 조금씩 섰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어딘가로 오르고 있었고... 얼마 안 가 종점.
종점에 내려, 어릴 적 그 옛날의 구멍가게 같은 '수퍼'에 들러... 맥주 한 캔과 담배 한 갑을 사서는 작은 골목길을 느리고 느리게 걸었습니다. 지지부진한 뉴타운 개발 사업 때문인지 이 작은 마을은 웬지 황량하고 어수선하면서도 고요하고 적막했습니다. 앙상한 철근이 반쯤 드러난 집들... 입이 아닌 옆구리가 터져 널브러진 종량제 쓰레기 봉투... 집요하고도 무료하게 거기로 달려드는 파리떼... 조금씩 허물어지고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담벼락 아래서 삼삼오오 모여 아직은 놀고 있는 아이들...
'철거'와 '인부구함', '이사'와 관련된 각종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전봇대 옆 담벼락에 위의 낙서가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담의 발치에는 버려진 라커 몇 개가 있었구요.
조금씩 미세한 금이 가 있는 담 한 가운데 파란색 라커로 새겨진 커다란 글씨. 그 맞은편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딱'하고 맥주캔을 땃습니다. 다소의 거품이 가라앉고 목을 축이며 다시 그 글씨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너'라는 큰 글씨 아래 그보다 다소 작은 영문 이니셜이 소심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이니셜의 여자는... 절대 육두문자가 날것 그대로 나오는 이 짧은 편지 아닌 편지를 읽지 못했을 겁니다. 읽을 필요도 읽어야할 이유도 사실 없는 것이지요.
이별의 사유가 어떠했든... 이 날것 그대로의 육성에는 고스란히 한 젊은 청년의 아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직은 이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내면의 답답함과 먹먹한 슬픔 등을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솔직하고 진솔한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저는 아직은 봄날일 것이 분명한 저 젊은 청년의 독백같은 편지에 답변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맥주 한 캔을 훌쩍 비우고... 무더운 땡볕 아래 맞은 편 담벼락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그리곤 댓글같은 답글을 버려진 라커를 들고 써 보았습니다.
과연 내 답변을
그 젊은 청년이 어느 날 불현 듯 다시 읽을지 못 읽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