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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리차드 휠러 / 홍익 / 1995년 10월
평점 :
절판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나는 이 책을 중학생 때 처음 읽었었다.
누군가가 너무나도 허무하기만한, 재미, 감동이라곤 찾아볼 수 조차 없는,소설같지도 않은 이야기라고 쉽게 매도해 버린 데서, 나는 내 어린 날을 되갚음이라도 하듯, 염치는 없지만 조금은 반박하고 싶었다. 좀 그렇긴 하지만 저기... 그래도...너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라고. 나는 적어도 그 시절의 이 책으로 감성의 골을 조금이라도 깊이 파내일 수 있었으므로.
"강물이 흐르는 곳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 것이었다" 라고 갈무리지으며, 다음 장 부터 이어지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을 읽고..." 라고 느낌을 적는 란에, 중학생의 내가 2장에 걸쳐 쓴 독후감을 읽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나에 대해서, 어떤 사심도 없이, 오직 로맨스에 치중하며 살아온 하염없이 순백하기만 한 나의 사춘기 시절을 되뇌어 보는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어쩜 "로미오 & 줄리엣"에 푹 빠져있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식상하고 이데올로기라할 만치 쓸데없는 남성적 사고에 치우친 작가의 상업주의적 발로인 "내가 반드시 돌아올테니 여기서 기다리시오"라는 얼토당토않은 대사에 이토록 열광하고 있었나 싶었다. 중세 깡통 기사가 내뱉었음 직한 그 말에.
" 너무나 감동적이며 한편으로는 너무 허탈했다. 1년 동안 끈기있게 생명을 연장해왔는데, 단 한 발의 총알에 그 끈질긴 생명을 죽게 내버려두다니...... 참, 너무 허무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내가 사는 이 삶의 공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난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 때문에 끈질기게 살아가는지 의문을 갖게했다. 이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이란 두가지 였다. 한 젊은 남자의 패기에 넘친 남자 간의 신의를 위한 약속과 그 남자와 한 여인과의 약속. 그러니까 제드 오웬 대위라는 인물이 가지는 두가지의 약속이다. 평화사절단으로 인디언 세계로 뛰어들면서 겪는 고역, 괴혈병, 콜레라로 죽어드는 영혼들을 위로하려 그들의 유언을 반드시 전해주겠다는 약속의 꼬리를 물고 고통과 험난한 1년의 삶의 의지가 매달렸다. 그는 이겨냈다. 그 파란색 가방의 의미가 그에게 지어 준 커다란 의무감이 나를 그 험난한 약속의 궤도로 끌고 갔다. 신의를 걸고 지켜낸 영웅, 그는 위대했다. 감동의 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잔나에게 꼭 저 미주리 강변에서 내가 갈테니 기다리라는 약속을 하고 떠났으나, 도저히 잠자코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수잔나는 수많은 격정을 겪고 그가 있다는 밴튼기지에 도착했는데, 돌아온 건 헛걸음질이었다는 생각은 나를 숨도 못 쉴만큼 아프게 했다. 제드에게 겨누어진 소총의 방아쇠가 당겨짐으로서 그의 생애가 끝난건 분명 큰 비애였다. 그가 스러진후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정말로 그가 총에 맞긴 했는지, 다시 살필만큼 허탈했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었는데 그 콘스타블 중위가 미웠다. 제이 콘스타블, 그 때문이다. 그 때문이다...... " -이하 생략
혼자 천장을 보며 눈만 꿈뻑 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책이라도 읽자라는 생각으로 다시 펴게 되었다. 나는 그때의 나에게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생각이나 하게 된거냐"라며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그 나이 대에 내가 저질렀던 일들을 곰곰 생각해 보다가, 그냥 말기로 했다.
미국의 이문열이라 할 만한 대단한 위인이 쓴 소설이구나. 왜, 이문열의 대작 있지않나, "선택"이라고...... 남자가 여자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따위 "여자란?" 을 정의해 버리는 위험한 소설들을 써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소설들과 가히 비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 소설도 한 바탕 페미니즘 논쟁의 핵폭풍을 봐야할 것 같군... ...
여자에게 지상에서 가장 슬프고 위대한 약속은 사랑에 대한 약속이며, 남자에게 있어서는 바로 대의와 신의를 위한 남자간의 약속이다! 라는 망언을 퍼부으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주 대차게도 이런 자기 생각을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글자 그대로 적어 놓고 있다.
이것을 보고, 사춘기를 지난 성인인 내가 다시 한 번 어떻게 "이 책은 감동적입니다"라는 비양심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겠나. 작가의 문장력만 아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