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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나는 이 소설을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들고 다녔다. 처음엔 편짓글이라 꽤나 흥미로울 듯 싶었는데 사건이 확 터지고, 굴곡이 심해, 한시도 시선을 놓을 수가 없는, 성격 급해진 요즘 TV속 드라마들에 익숙해져서 인지 이 책 초반부를 읽기란 참으로 오랜 수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워낙 책을 읽는 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일 수도 있으나, 지금 생각같아서는 나의 사춘기 시절을 함께 지낸 아주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만족하고 아직도 이 책을 잊지 못하며, 내 생애 최고의 책이라 평가한다. 14살 때는, 단순히 큰언니가 읽고 있길래 나도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집어들었었다. '젊은'이라는 수식구가 참 우습게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 베르테르의 삶이 나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처럼 내가 임자있는 여자를 사랑해서, 자살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자이고 사랑 때문에 죽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 어떤 소설 외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여 굳이, 이 책에 대한 평가 아닌 평가를 절대 내릴 수가 없다. 오직 소설 속의 이야기에 충실할 것이며, 또한 그 외적 요소들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터질 듯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작'이라는 것이다. 시대를 따지고, 장치를 따지면 그 소설은 백년 후에도 그 후에도 절대 사람들에게 공감되어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읽혀질 수 없다. '감성' 하나면 충분하다. 그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것이 먼 과거의 일이든, 현실의 일이든, 미래의 일이든 상관 없다. '감성전달'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어상의 문제 뿐이다.
베르테르는 스스로 판단해버렸다. 그는 결코 이룰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은, 쓸쓸하고도 나약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그는 굉장히 예민하고도 감성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로테를 향해 피끓는 사랑을 할 수 있었고, 자살을 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르테르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로테의 거절에 대한 확대 해석과 주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매우 내성적인 그의 성격 탓이다.
나도 그랬다. 나 혼자 생각해서 나 혼자 괴로워했다. 그래서 안타깝다.베르테르도 그렇고,옛날 어린 나에게도 말이다. 베르테르가 그만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구절에서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 풍부한 미사어구 때문이 아니라, 이렇듯 절절하게도 와닿을 수 있는 진실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다.
고전이라고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 말자는 어떤 서평을 읽었을 때 어찌나 안타깝던지, 그냥 조용히 '모두 잠든 조용한 밤에 엷은 스탠드 빛 아래에서 약간 들뜬 마음으로 책을 정독해 보세요'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다시 정확하게 책을 한 자, 한 자,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읽는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도 다른 소설이라면 몰라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철퇴를 가할 수는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