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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6년 6월
평점 :
우리는 왜 실재하는가? 내가 지금 왜,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서 숨을 쉬고 있어야하는가에 대해 이 책은 길다면 길게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답이 있다. 바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것.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타인을 위한 삶을 교육받아졌었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봉사'는 다른 의미의 '이기심'이라는 것.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하고 남을 배려해야하며 더 나아가서는 남을 위해 살아가는 봉사정신을 기리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조금 삐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남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도움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중 과연 누가 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안기며 더 많은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했다. 남을 돕는 다는 것은 도움의 손길을 보낼 수 있는 여유나 힘이, 상대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뜻이므로 결론적으로 그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뽐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다. 봉사를 하러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아마 자기 현재의 삶이 나름대로는 성공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면서 부자들로부터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해소하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을 도우면 우리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봉사활동을 맨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도 하나같이 모두 그러하다. '남을 위해 살라'는 다른 말로 '나를 위해 봉사해라'라는 말과 뭐가 다를까. 지구 상에 나와 친구, 딱 두 사람만 존재한다면 이해가 더욱 쉽다. 난 그 친구에게 지금까지 배워온 대로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라고 충고할 수 있다. 그 '남'이라는 건 바로 말하는 당사자를 뜻하는 것이므로 '나에게 잘해라'란 말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봉사는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남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지 말아라.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을 돕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말로는 어렸을 적부터 배워 온 '겸손'이라는 미덕 때문에 '배려'라는 걸 입에 달고 살지만 실로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배우자나 부모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상대를 위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자신의 안일을 위해, 심적 안정을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용기이며, 또한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존중받아야하는 건 당연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이제는 톡 까놓고 진실을 말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너무도 이기적인 모습들로까지 비춰질 지도 모를 '자기애'를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이제 '남을 위한' 이런 본심에도 없는 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을,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다면 좀 더 우리 자신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는 정말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행되어야할 첫 번째 조건은,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 실재하기'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청소년기에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나는 어디서 왔고, 어차피 죽을 인생에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자아를 형성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온갖 벽보가 덕지덕지 붙은 전봇대에 불과했다. 나는 그저 학생이고, 예비 간호사이며, 털털한 친구였고, 유머스러운 넷째 딸이며, 까칠한 언니였다. 이 모든 꺼풀을 벗겨낸 온전한 '나'를 내보이지는 못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어떻게 조각했느냐는 질문에 '네모난 석고에 이미 들어차 있는 아름다운 남자의 형상을 제외한 부분을 깎았을 뿐'이라는 대답은 큰 감명이었다. 나는 그동안 친구들을, 이웃을, 가족을 껍질을 벗긴 진실 된 모습으로 대했고, 그들 또한 진실 된 모습으로 나와 대면했을까.
'자기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친구'의 모습에 국한되지 않고 거기서 한 꺼풀 벗겨낸 온전한 인간으로서, 편견을 깨부순 채 그냥 그러한 사람, 남에게 충고하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친구를 봐왔다면 내가 그 아이와 끊임없이 다퉈야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나는 친구를 온전한 개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왠지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너는 그냥 그런 사람이야.'라며 모든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보고 인정하고 싶은 마음을 빨리 적용시키고 싶었다.
이렇듯 일단 나로 존재한 다음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 있다. 사랑이 깨질까봐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말고, 내일 죽을 지도 모를 자신을 위해 지금을 아끼며 살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동안 자신을 옥죄었던 그 모든 것을 용서하며 맘껏 웃어라는 것.
죄책감이란 것은 착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리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왔는지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그동안 남을, 또는 그 사건을, 일어날 수밖에 없던 그 운명을 단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모습으로 결국 나를 질타하기 위한 채찍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아진 건 없었다.
물론, 나는 앞으로 같은 상황에 닥친다면 절대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를 그 '똑같은 사건'에 집착하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 난 끊임없이 나를 질타하고 나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그리고 용서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왜냐면... 엘리자베스 퀴블러가 말한대로, 내가 이 공간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 내가 어떤 수습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노력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때의 나를 용서하는 것.
이 책에서처럼 의외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보다 나를 용서하는 것이 사실은 더 어려웠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잣대를 적용시키라는 교육을 배웠기 때문일까. 나이기 때문에 만만하고, 나니까 스스로에게 더 쉽게 화를 내고 더 다그치고, 더 구석으로 내모는 또 다른 나의 모습.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 안쓰러워서 그때의 나를 만나 머를 쓰다듬고 안아주며 "너는 잘못이 없다"며 위로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는 올곧게 나를 사랑하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어렴풋이 나의 별 대수롭지 않은 재능과 외모를 스스로 칭송하며,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부정의 기운으로 저 멀리 꺼져버릴 것 같은 나를 어떻게 해서든 수면 가까이로나 끄집어 올려보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이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것이다. 나는 대단한 힘을 지녔고, 무한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다. 그것 또한 내가 지금 현재 이 곳에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