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아일랜드 - 개정판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픈 아일랜드>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 만화가 이원복 교수 편에서 보고 읽게 됐습니다. 그가 추천한 책 중 단연 눈에 띄였는데요, '먼나라 이웃나라' 내공이 거저 나오는게 아님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이 책은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에 관한 것으로, 박지향 교수의 글쓰기가 더해져 너르고 깊은 인문학적 가치를 뽐냅니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보며 '무엇을' 발견하고 성찰했는지에 대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 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잉글랜드, 웨이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가 영국입니다. 잉글랜드는 그 자체로 영국을 대표했고, ‘잉글랜드가 곧 영국’이라는 의식이 20세기 후반까지도 지속되었다네요)는 고만고만 했습니다. 외려 아일랜드는 성자와 학자들의 땅, 북유럽 신화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그러다 1536년 종교개혁을 깃점으로 영국의 본격적인 아일랜드 정복과 지배가 시작됐습니다.

영국에게 아일랜드는 문명 수준이 뒤떨어진, 게으르고 술독에 빠져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하얀 깜둥이’였습니다. 그들을 개종(종교개혁 전 영국과 아일랜드는 모두 카톨릭이었음)하느니 단순히 대체해 버리는 것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아일랜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신 vs 구, 문명 vs 비문명, 기독교 vs 카톨릭... 이런 이분법 구도 아래 오해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해, 1600년 경 잉글랜드에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잉글랜드 아이들을 잡아 먹기 위해 석쇠에 굽고 있는 장면을 그린 판화들이 유포되어 가톨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도 했다네요.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나라의 왕래는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흐려놓기도 했습니다.
태생, 혈통, 언어, 일종의 정신 상태, 종교까지 가세해 토착 아일랜드인, 구 잉글랜드인, 신 잉글랜드인, 그리고 얼스터 스코트랜드인으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단합해도 모자를 판에 편을 갈라 타자화 해버리고, 너는 아일랜드인이 아니야! 라는 선긋기로 끝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혼란과 함께 해가 저물지 않는 대영 제국(19세기) 옆에서 아일랜드는 '가장 슬프고 비참한 나라' 라는 정체성을 굳혀 갑니다.
선량한 아일랜드와 사악한 잉글랜드, 착한 의붓딸과 못된 계모 이미지 그리고 언젠가 위대한 전통 문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잉글랜드의 간섭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확신이 실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대체해 버립니다.
영국에 아일랜드는 단지 ‘하나의 문제’일 뿐이지만, 아일랜드에 영국은 ‘유일한 문제’였고, 잉글랜드 사람들은 역사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데 반해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잊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미국자본의 투자로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합니다. 외려 빛났던 영광을 가진 영국보다 잘 살게 되었어요.
아일랜드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을 뛰어넘자 미움도 가시고 너그러워집니다. 과거 영국인은 체통 지키기에 급급한 속물들이며,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아일랜드 운명에 뛰어든 이방인으로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말이죠.

 

그 후(1970년대 초) 아일랜드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역사 다시보기' 였습니다.
잘 살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슬프고 비참한 나라’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며 피해의식으로 위안받고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죠. 아일랜드 말고도 ‘예외적으로 비극적이고 참혹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며 자국의 역사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원인을 밖이 아닌 안에서 찾으려는 이성적인 노력은 유럽연합 가입과 함께 빛을 발합니다.
섬나라 근성을 버리고 유럽 내의 아일랜드, 나아가 세계 속의 아일랜드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죠.
모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정체성 변화는 미래로의 도약, 그 시작점이 됩니다.

한동안 북유럽을 참 많이 흠모했습니다.
우리의 복잡다양한 문제 해결을 북유럽에서 찾고자 했으며, 그들의 복지, 공평, 공존, 존중...의 높은 가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고 싶어했어요.
북유럽과 관련된 몇몇 책을 읽어봤으나 알 수 없었습니다.
뜻밖에 답이 이 책에 있더군요.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냉정히 되돌아보고, 우리 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처럼 지정학적으로 변두리에 위치하며 강대국 옆에서 고난을 겪었고, 지지리도 못살고 가난했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단시간에 경제성장 기적을 이룬 아일랜드가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가졌던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아일랜드를 통해 얻어야 할 교훈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소중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박지향 교수는 2002년 <슬픈 아일랜드>를 출간하며 우리나라 독자들이 아일랜드에 관심이나 있을까, 그저 소수 인문학 전공자나 읽어 보겠지.... 했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2008년 개정판이 나올 수 있었다네요.
이 책을 읽어보니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다양하고 폭 깊은 박교수의 글솜씨는 넘치고도 남습니다. 

​by 책과의 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