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하는 벽, 조정래, 430쪽>
독서와 글쓰기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는 회의감에 푸욱 빠진 최근이었습니다. 김용옥 선생의
<중용, 인간의 맛>이 절 기다리고 있지만, 당췌 읽고 싶지가 않더군요.
투시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책 제목만 보면 내용이 연상되면서 제 자신이 자꾸 지식백과가 되
간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날들이었어요.
그러던 차, 잊고 있었던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빈곤한 제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만들 '문학'이 말이지요. 문학을 두루 읽고 전문서적을 읽으면 이
해력이 훨씬 빨라진다지요. 인간을 도서관에 비유한다면 문학작품은 대들보에 해당한다는 멋진
말도 있어요.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소설의 장점은 가독성과 재미 아닐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예외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제가 쓸 서평은 조정래 선생의 <외면하는 벽> 입니다.
사전정보 없이 선택한 이 책은 조정래 선생이 32살 때 쓰신 글로서,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
렀더군요.
그 세월에도 작가의 글솜씨는 진행형으로 빛나는 수작이었고, 글을 채우고 있는 내용은 40년 전
과 달리 변한게 없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과거 한때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수집했던 적이 있어요.
매년 발간되는 이 책을 한권 한권씩 책장에 꽂으면서 흐뭇했던 기억이 새롭군요. 그러나, 언제부
터인가 수집에 흥미를 잃어버린 건 제가 갖고 있는 단편에 대한 낯섬때문이었지요.
제게 소설 단편은 얇은 커튼이에요. 바람에 날려 잡혀지지 않고, 잡아도 그립감이 없어 언제나 허
전했지요. 무슨 얘기를 하려나 하고 읽다보면 소설을 금방 끝나기 마련이고, 이런 얘기인가 싶다
보면 막연해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여 언제부터인가 단편을 잘 안 읽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책이, 단편을 엮은 책이더군요.
아, 그런데, 역시 대가는 大家인가 봅니다.
짧은 글 속 메시지는 생각보다 강했고 완독 후에도 잔상이 계속 남더군요. 그리고 40여 년전, 32
살 나이가 무색할만큼 책 읽는 내내 밑줄 긋게 하는 문장의 저력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조정래 선생은 역사인식이 확고한, 우리 시대 빛나는 양심가 중 한 분이시지요.
조정래 선생이 이 글을 썼던 1974년과 지금을 비교해볼 때 살 만한 세상이 되었는가, 인간답게 살
고 있는가란 질문에 작가로서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더군요.
이 대답에 심히 공감하는 마음으로 두 편을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흔적>에서는 혼자 셋방살이 하다 자살한 익명의 미스 김이 등장합니다. 1년 반 책상 옆
구리 맞대고 일한 동료 중 그녀가 혼자 산다는 것과 자살에 이르기까지 흔들렸을 수많은 시간을 눈
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미스 김의 빈자리는 아무렇지 않게 미스 강으로 대체되지요.
조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미스 김은 그저 미스 강으로 대체되는 존재일 뿐이에
요. 이 교체는 비단 미스 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일이구요.
<외면하는 벽>에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웃의 죽음 얘기가 나옵니다.
아파트 이웃들은 누가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는 관심이 없고 이렇게 얘기해요.
"이거 참 큰 야단났네. 시체를 이고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나 그래. 재수가 없을래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그리고 급기야 통장을 앞세워 조문와서 한다는 소리가 '곡소리를 그만해달라' 라는 말이지 뭐에요.
이거 참.
가족의 죽음에 비통한 유족들은 울컥 화를 내보지만, 결국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애도합니다.
이러한 소설 속 내용이 40년 전과 비교할 때,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변화가 드라마틱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지요.
변화는 보이지 않게 서서히 우리가 만들어가고 찾아야 할 대상,이겠지요.
소개한 두 작품 외 모두 뛰어납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감동이 덜하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책은 절로 빛나는 대가의 면모로 낯선
단편에 대한 선입견을 한방에 날려버리게 한, 그렇게 제게 기억되는 책입니다.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득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라 말씀하시는 조정래 선생과 같이 저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
력할 것임을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이렇게 모았던 책도 몇년 전 도서대방출 때 사라졌지요.
읽은 날 2012. 7. 7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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