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몇년 전부터 읽을 책 리스트에 등장했던 이 책, 드디어 읽게 됐다. (역시 반값의 위력은 세다. ㅋ)
'드디어'에 걸맞는 첫 페이지 - 작가의 사인과 소갯말부터 설렌다.

"4세대 독일계 미국인.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의 안락한 환경에서 살고 있음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것이 흠)
아주 오래 전
미국 보명대의 낙오병으로서, 전쟁포로로서,
엘베강변의 피렌체라는
독일 드레스덴의 대공습 현장에서 살아 남아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비행접시를 보내오는 행성 트랄파마도어의 전보문 형식으로 쓴 정신분열성 소설이다.
평화."
이 책 <제5도살장>은 드레스덴 공습에서 살아남은 작가의 이야기이다.
드레스덴 소이탄 폭격, 익히 잘 알고 있는 히로시마보다 더 심하며,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이었댄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http://blog.daum.net/robustus/16887617)를 클릭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가장 인상적이고 중독성 있는 문구, '그렇게 가는거지'
"물론, 롯의 아내는 그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집이 있는 곳을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았고, 나는 그 때문에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얼마나 인간적인 행동인가.
그리하여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렇게 가는거지.
인간은 뒤 돌아보면 안된다. 나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가는거다. 아버지가 사냥 갔다가 친구 총에 맞아 숨졌다. '그렇게 가는거지'
빌리를 버리고 간 척후병이 총에 맞아 새하얀 눈을 딸기 빙과색으로 물을일 때도, '그렇게 가는거지'
그렇게, 가는거다. 대단하고 거창한 이유가 있을것만 같지만 결론은 간거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으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 생각났다.
두 책 모두 전쟁을 겪은 자전적 이야기인 점, 쉴 새 없는 시간과 공간의 넘나듬 혹은 상상과 경계
가 불분명한 현실은 그만큼 헤어나오기 힘든 전쟁의 상처를 역설한다는 점은 비슷했지만, 이 소설
이 주는 메세지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보다 한층 더 명확하다.
빌리 필그림. 도무지 군인 티가 나지 않고 심지어 지저분한 '홍학'같은 이 소설 <제5도살장>의
주인공이다. 빌리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비행하며, 시작도 중간도 끝도 서스펜스도 교훈도 원인도
결과도 없는 책을 가진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 당한다.
전쟁 혹은 인생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맞서본 자라면, 누구든 했을법한 질문을 한다.
"왜 하필 나지요?"
"그것 참 지구인다운 질문이군. 필그림선생. 왜 하필 당신이냐? 같은 식으로 생각하면 왜 하필
우리지? 왜 하필 어떤 것이지? 그 이유는 단지 이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오. 호박에 갇힌 벌레
들을 본 적이 있소?"
"있습니다."
"필그림 선생, 우리는 지금 이순간이라는 호박 속에 갇혀 있는 것이오. 왜라는 건 없소."
이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랜다. '왜'라는 질문은 필요없다.
트랄파마도어인은 또 말한다.
"나는 우주의 유인 행성 31곳에 가 보았고 1백곳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했소. 자유의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행성은 지구뿐이더군."
끔찍한 전쟁을 겪은 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남겨진 상흔.
인생, 이유도 없고 자유의지도 필요 없는 것.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고 그저 그렇게 갈 뿐인,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한 채 좋은 시간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가는거지....
자꾸 이 말을 되뇌며, 작가의 해학과 시크한 문체 속에 반전에 대한 공감을 키워간다.
그렇다해도 전쟁이란.
" '반전책을 쓴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뭐라는지 아시오?'
'아니오, 뭐라고 하시는데요?'
'차라리 반빙하(反氷河) 책을 쓰지 그래요? 그럽니다.'
물론, 그의 말은 전쟁은 항상 있는 거고, 빙하만큼이나 막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동감이다.
그리고 전쟁이 빙하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밀려오지 않더라도, 그 흔해빠진 죽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빙하처럼 밀려오고 여전한 흔해빠진 죽음.
그렇게 가는거라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그렇게 보낼 수 없음을 발견한다.

읽은 날 2012. 3.10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