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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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엄기호>

 

'자아실현'과 '그냥'사이 어디쯤 우리는 각자 너무나 열심히 살고 있다. 박카스의 청춘에서 우루사의 직장인을 거쳐 케토톱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열정적인 존재가 되곤 한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어라', '네 일에 열정을 쏟아 부어라', '쫀쫀하게 돈 따위에 연연하지 마라',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우리는 꿈을 꾼다. 스스로 꾸기도 하고 강요받기도 한다. 그 꿈 너머에 덫이 있어 우리의 꿈을 인질삼아 우리 노동을 공짜와 다름없이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이 뭐라 하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네 삶을 값지게 살라 한다. 우리 부모는 열심히 일만 하는 개미세대였다면 우리세대는 베짱이가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여기에 베짱이의 역설이 있다. 부지런하거나 재능이 넘쳐 흐르지 않으면 베짱이는 베짱이 대우도 못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베짱이는 개미보다 더 지독하게 일해야 한다. 이것이 자아실현이다.

 

TV각종 오디션 프로에 멘토가 넘쳐 난다. 멘토는 그들이 가진 힘으로 위로를 멘티에게 건넨다. 멘티는 여전히 예의 긍정으로 가능성을 꿈꾸며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상상한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다.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좌절했기 때문이다', '네가 어리석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멘토는 멘티의 힘인 반면, 사회를 가리는 판타지다.

 

몇년 전 등장한 '긍정 산업'이나 개신교 일각에서 몰아 붙이는 '긍정 교리'가 넘쳐 난다. 긍정의 힘, 분명 있고 힘 또한 세다. 그러나 긍정의 힘으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문제가 있다면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불평하지 말고 네 안에서 찾으라, 자신의 내부를 잘 들여다보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마침내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사회는 '보호'되고  대신 사.람.이 폭로된다.

 

카이스트 사태 - 징벌적 장학금이 있다. 평균에 가까운 학점. 그러나 이 '평균'은 '중간은 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균은 곧 탈락이다. 그리고 탈락은 징벌로 이어진다. 패자에게는 일말의 기회가 없는, 아니 기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에게 모독과 치욕감을 준다.

열심히 살아왔고 살던 이에게 사회는 뿌듯함 대신 굴욕감을 준다. 나를 보호해 주리라 여겼던 사회는 오히려 나를 배제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한다.

 

서점가에 자기계발서가 인기다. "이게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똑같이 가진 문제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결국 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네 문제이니 네가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위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한 친구는 이것이 '뽕'과 비슷하다는 말을 했다. 처음 책을 사 읽을 때는 그대로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대로 할 수도 없고 그대로 해도 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면 다시 마약을 찾듯이 다른 자기계발서를 찾게 되고 결국 책장 가득히 자기계발서만 채우게 된다."

 

저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몰입, 열정, 변화...숱하게 들어온 얘기다. 그 단어의 매력에 대해 알지만, 숨어있는 꼭두각시 인형 조종자가 누구인지도 알아야 한다.

자살로 내몰려진 학생들, 말하지 못하는 고통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겪는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호소할 수 없는 사람은 상처 받지 않은 듯 숨기며 살아가야 한다. 심지어 같은 학생들에게조차도 묻혀 버린다.

어쩜, 지금 대학생들은 부모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사는 동네 등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위치가 정해져 동시대인으로 체감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장례식 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 학생들의 하소연을 듣다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이 삶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들이 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꼬라지'였다.  지금 여기 살아가는 우리들의 궁상맞고, 망가지고, 팍팍하고, 초라하고, 강퍅한 모습을 슬퍼했다.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비극을 보았다."

 

우리는 개미처럼 살자고 버는데 벌다 죽을 지경이거나, 베짱이처럼 가다가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다 굶어죽을 지경이다. 그저 소소하게 개짱이처럼 살아갈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정말 어쩜 우리는 그의 장례식 우리의 비극을 것일지도 모른다.

가진 없이 태어나 주먹으로 정당하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을 뿐인데 결국...

우리가 알던 삶은 끝났다.

 

우리가 알던 , 우리가 꿈꿔 왔던 삶이 끝났음을 우리도 안다. 그의 장례식날 우리는 슬퍼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지금은...희망을 말하지만 냉소한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어쩌자는 거냐고. 얘기 한번 해보라고. 들어, 보겠다고.

머리를 뒤로 빼고 팔짱 낀채 싸늘하게 말한다. 그래, 어쩌자고!

 

" 말은 정말 대안을 찾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말인지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상당히 공격적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수동적인 말이다. 대안이 자기 손에 구체적으로 주어질 경우에만 자신은 움직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는 자기가 나서서 대안을 생산하고 실천해보겠다는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요즘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심을 품게 되는 다른 이유를 하나 발견했다.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꼼꼼하게 자기감정을 이입하며 알아보고 살펴보려는 태도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는 발견할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의 저자는 말한다. 대안을 찾기보다감하자고. 동시대인임을 알아가자고.

경제가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에 대해 '누가 그걸 모르나요?' 라고 어깨 한번 으쓱하며 대꾸하지 말자고. 세상을 향해 짱돌을 던지는 사람들만이 사회에 대해 증언할 있는 아니다. 우리 모두 김진숙 지도위원처럼 투쟁할 없다. 비록 삶은 비루하여 세상과 맞설 용기는 없다 하더라도 용기를 사람들에게 의리를 저버리지 말자.

그리고 권력에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할 밖에 없었는가를 드러낼 있다.

 

"‘사마귀 유치원 우리들 모두가 불쌍해졌다고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대신 시대를 싸늘하게 풍자한다. 그래서 공감은 한층 격이 높다. 사람을 옹호하고 사회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감은 시대를 읽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미디어 이야기나 정치적인 현상을 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공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는 별로 공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나뿐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느끼자. 그것을 느꼈을 세상과 부딪칠 있는 용기를 있다. 쫄지 않을 있다.

공감, 동감. 적선을 하는 쪽이 동감이고, 거지와 자신 사이에 공통의 운명 같은 것을 직감하고 공포를 느껴 외면할 수도 있는 쪽이 공감이다.

'시대의 어둠' 보는 동시대인이 되자. 동료 (시대의 어둠을 보았기에 운명까지 함께할 있는 사람) 되지 못할지언정 공감, 하자.

 

아무리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내 옆에 누군가가 나와 함께 망해가는 세상을 견뎌내고 있다면 얼마든지 신날 수 있다. 내 삶을 응원해주는 동료, 너의 삶을 공감해주는 나.

 

우리 삶을 바꾸려 하지 말자. 다만 우리 삶을 옹호하자. 무엇보다 비참하지만 이 비참함을 같이 껴안을 동료가 있다면 삶은 위대하다. 아니, 삶은 끈질기기에 위대한 것임을! 이 삶의 끈질김에 충실하자.

 

한진중공업 - 김진숙 위원과 희망버스

 

※ 1577-6406은 대리운전 전화번호, 이 번호를 이용하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후원할 수 있다.

 

 

읽은 2012. 1. 26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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