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 : 수도권편 - 동네가 보인다 선거가 보인다 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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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최장집 선생이 한 최고의 찬사(이 책의 출간은 사건이다)를 퍼뒀었지만,
(http://blog.naver.com/heutekom/150082583029)
손낙구의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 실물을 펼쳐 보니;
헉-
잠자리에서 펼쳤으나 잠이 안 왔다.


책의 장점과 미덕을 찬사를 일일이 열거해주기 어렵다.
그냥 손낙구 만세! 책날개의 저자 소개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으나 노동현실이 “너무 참담했기에”,

“창자를 끊어내듯” 공부를 포기했었다는 것이다. 


 

‘공부’란 소위 무엇이냐? ‘연구’란 무엇이냐?
문학이란 뭔 개뼉다귀며, 문화연구란 무슨 염소 껌 씹는 소리냐? 


어설프게 ‘공부’하는 것, 또는 제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인데
‘공부’한답시고 ‘사회’에서 뭔가 대접받는 일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 앞에서 사회학자와 정치학자 중에도 양심 있는 자들은 저렇게 느꼈을 것이다.

책은 문화학자ㆍ사회학자ㆍ정치학자들이 해야 할,

그러나 ‘학진’ 지원이 없다면 하지 않을(못할) 수고를 확 덜어준다.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사람들은 물론 학자 뿐 아니다.

운동가와 공무원, 심지어 한나라당일 수도 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속살을 제대로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문화학ㆍ정치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존재와 의식’의 관계,

풀어말하면 아비투스와 계급서열에서의 위치와 투표 성향을,

그리고 그 상관관계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 주목할 점 한 가지.
계급(배반)투표에 관한 서론에서의 해석(그러니까 책 전체의 결론과도 같다.)은

새롭고 탁월하면서도, 지나치게 앞에 놓임으로써, 오해의 소지가 있게끔 기술돼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소속 계급을 배반하는 ‘멍청한’ 투표가 일반적이라는 통속의 인식과 달리,
부동산 소유와 그 형태(즉 자산 기준의 계급 서열)와 투표 성향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즉, 집이든 신앙심이든 현금이든,

뭐든 많이 가진 강남의 동네들에서 한나라당을 확실히 지지할 뿐 아니라

(강남구 압구정 1동ㆍ2동이 최고, 그 다음에 도곡2동 송파구 잠실7동 순),

집을 못 가진 가난한 동네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을 찍은 경향이 실제로 뚜렷하다(관악구과 종로구의 일부 동들)는 것이다.
좋은 발견이지만, 이는 (저자가 적시한대로) 인천을 제외한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의 경향이다.

저자는 여기까지만 말했다.

물론 이 책이 일단 ‘수도권편’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영호남 지역주의나 세대 문제와 부동산 자산 사이의 좀더 거시적인 상관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저자가 말한 상황이 경기ㆍ인천의 (소)지역에서 학벌 등등,

다른 특수한 어떤 변인에 의해 왜곡ㆍ변형되는지에 대한 것도 한마디쯤 덧붙이고 갔었다면 한다는 말이다.

물론 너무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하는 반찬투정 같은 것이다.
아무튼 이 책에서 (서울의) 유권자가 바보라서 사람 아닌

쥐나 개 같은 것을 ‘대표’로 선출한다는 식의생각이 잘못돼 있음을 진짜 ‘실증’해준다.

 
그래서, 2000년대 이래 급격하게 투표율이 떨어져온 한국의 선거에서는 일단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조건 필요한 일이라는 점도 적시되어 있다.
IMF 이후 정치를 떠난 것은 가난하고 집 없는,
그리고 비정규직 인간이라는 점을 책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선거에서 강남ㆍ서초 등의 지역은 확실히 투표율이 높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시한 '신자'들이 많다. 확실히 신께서 부자를 보호한다.)

저자의 말대로 따라서 투표율이 낮은 것은 먹고 살기 힘들고
그래서 안정적으로 ‘지역 정치’의 주체가 될 겨를이 없으며,
가난하고 바쁜 그들을 진짜 ‘대변’해줄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빈곤과 나쁜정치의 이 악순환을 누가 끊을 것인가? 

우선 투표율을 높여라, 특히 수도권에서.
20대와 비정규직으로 하여금 투표하도록 해라, 특히 서울에서.
이번 지방선거와 한국 민주주의 회생의 지상명령이어야 한다. 


덧)
가격은 좀 혹독하다. 큰 거 한 장. 100,000원!
1600여 페이지짜리 책을 만들어 낸
<후마니타스>에게도 박수를 쳐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페이퍼백이나 다이제스트판으로 쪼개서 내든지 해서
가난한 활동가들과 학생들도 사보게 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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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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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1)

  고바야시 다키지/양희진 역, <게 공선(蟹工船)>, 문파랑, 2008.08

1> 80년 전의 프롤레타리아가 오늘의 88만원 세대에게 말을 건다

무려 80년 전(1929년)에 발표된 이 ‘고전적인’ 프로소설이 작년부터 느닷없이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 열기는 올해까지 이어지고 TVㆍ여성지 등에까지 작품이 소개되면서, 무려 30만권이나 책이 팔렸나갔다 한다. 출판대국이라는 일본에서도 요즘은 워낙 책이 안 읽히기 때문에 이 정도 셀러도 대단한 수준이라 한다. <yahoo Japan>에 들어가보니, 아예 ‘蟹工船 ブーム(게공선 붐)’, ‘蟹工船 감상문’도 등록된 검색어가 되어 있다.

이 붐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배경은 신자유주의가 일본의 청년 계층에 강요하는 고통이다. 일본의 ‘88만원 세대’인 ‘워킹푸어(working poor)’ 세대에게 80년 전에 씌어진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메시지가 ‘현실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공산당도 이 붐에 크게 고무되어 있다. 마이니치 방송에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당수가 직접 나가서 당원이었던 고바야시 다키지와 일본 공산당의 인연을 강조하는가 하면, ‘게공선 붐’ 덕분에 작년 10월 이후 일본공산당에 무려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새로 입당했다 한다.
http://headlines.yahoo.co.jp/hl?a=20080831-00000011-maip-pol
그런데 이 붐을 위해서 진보적인 일본 근대문학 연구자들이 시간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쓴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으로 역시 ‘붐’은 설명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지옥 같은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내놓은 채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이 결국 투쟁에 나서고 패배한다는 서사는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캄차카 해에 떠 있는 게 가공선에서의 상황이 '2008년 현재'의 상황이 세부적으로 같을 리는 없다. 더구나 설정돼 있는 '바다'와 '선상파업'의 상황이란 그야말로 극한적이고, 또 노동자들을 둘러싼 정치와 이데올로기적 지형도 다르지 않을까?

또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고(의도적으로 이렇게 창작되었다 한다.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에게 고바야시가 보낸 편지의 일부가 작품해설에 인용돼 있음.), 많은 노동소설이 그러하듯이 서사는 (좋은 의미에서) 상당히 거칠다. '섬세한(?)' 일본 독자들이 이런 걸 어떻게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참으로 중요하고 또 고무적인 수용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 독서와 한일 국제 연대

이런 붐을 타고 책이 서울에서 8월에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많은 기대를 갖고 읽었다.
명성으로만 듣던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은 훌륭했고, 새로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와 ‘제국’이 한편 자국의 노동계급을 처절하게 착취하며 건설된 것이라는 점과 더불어, 1920년대 말 일본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정세’가 어떤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리얼리스트로서 고바야시는 고립된 게 가공선에서의 투쟁을 둘러싼 ‘총체’를 붙잡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노동자들의 목숨에 닥치는 일본 자본주의의 현재를 군국주의화 과정과 국제정세에 연관시킨 것이다. 시공간적 배경과 자연스럽게 결부된 미묘한 러시아니즘이나 국가주의 문제는 특히 흥미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다. 

“넷, 그리고, ‘조직’, ‘투쟁’이라는, 이 위대한 경험을 처음으로 알게 된 어업노동자와 젊은 잡일꾼들이 경찰서의 문을 나서자, 다양한 노동계층 속으로 각각 파고들게 되었다는 것. / 이 한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이다. (1929년 3월 30일)”

이 식민지란 당연히 조선과 대만이며 또한 홋카이도라는 내부 식민지이기도 하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오타루상고 출신이며 홋카이도 노동운동에 참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투쟁경력을 시작했다. 물론 조선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81) “내지에서는, 노동자의 힘이 커져서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장도 대부분 개척해버리자,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사할린으로’ 갈고리 같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곳에서는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와 똑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노동자를 ‘혹사’시킬 수 있었다.”


82~3) “사람들은 아침에 어두컴컴할 때부터 일터로 내몰렸다. 그리고 곡괭이 끝이 힐끗힐끗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주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했다. 근처에 세워져 있는 감옥에서 일하는 죄수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특히 조선인은 십장들에게도, 같은 동료 인부(일본인)들에게도, ‘짓밟히는’ 대우를 받았다.”

위의 두 단락은 식민지 시기 한일 노동자의 연대의 조건을 잘 정리해서 말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독서’의 교류는 구조화되어 있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일본 소설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으며, ‘문학’을 넘는 차원의 새로운 동시성과 문화‘교류’도 일상화되어 있다. 이는 국경을 넘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교류는 연대의 기반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자본주의적 동시성은 ‘연대’를 꿈꾸게 했었다. 1920년대의 조선 노동자와 청년들은 일본의 좌파와 노동운동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반대로 그들이 일본 노동운동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1920-30년대의 <게 공선> 독자 중에도 식민지 청년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연대의 조건은 1920년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식민지-제국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서 노동자-청년들은 유사한 조건에 처해있다.

‘88만원 세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희망청>에서 한일 청년 단체들 사이에서 청년실업ㆍ비정규직 문제로 작은 연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본 여성들이 <대장금>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때문에 한국(여성)에 국경을 넘는 연대감을 느꼈듯이, 이런 소설이 연대를 위한 상상력의 기반이 되면 좋겠다. 연대야말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지상(至上)의 악(惡)에 맞설 수 있는 힘이다. 

진보적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나 문화산물이 교환되고, 그래서 '헌법 9조'든 ‘88만원세대(워킹푸어)'에 대해서든 한국과 일본의 청년세대가 공동의 전선을 설치하는 미래를 꿈꿔본다. 물론 1차적인 조건은 <게 공선>의 노동자들처럼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스스로 먼저 일어서는 일일 것이다. ‘당사자 운동’ 말이다. (*<게 공선> 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와 논의는 다음 기회에 차차~.) 

덧>
변형 문고판 200페이지 가량의 책이라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다 아마추어인지 악문과 졸문이 참으로 많다. 단어 선택, 구두점 사용도 그야말로 '초벌(또는 초보) 번역' 티를 못 벗었다. 이러면 책장을 못 넘긴다. ‘편집자주’나 책 말미에 붙은 작품 해설 자체에 악문과 졸문이 많아서, 안타까웠다.
편집자가 이 글을 보신다면, 다음 쇄를 찍을 때 반드시 전문적인 교정자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 원고를 개정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오자와 어색한 문장을 바로잡고,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어식 문장도 고치기 바란다. ‘어업노동자’ ‘잡일꾼’ 등의 어휘 선택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많은 한국 젊은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본소설을 읽을 텐데, 지금 이대로는 정말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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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플래닛 -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외 지음, 홍은택 외 옮김 / 윌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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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츄~! 펴자마자 이 책에 ‘쎄게’ ‘꽂혀’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있다. 그가 대식가이든 미식가이든, 여성이건 남성이건, 채식주의자건 비만인이건... R선생처럼 먹는 일 자체를 경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빼고. 먹거리(먹기+먹는 파티+먹는 곳+요리하기+여행하며 먹기+누군가에게 해 먹이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소장할 만하다. 

**

‘요리 기행’류의 글을 누구나 쓰고 싶어하고 또한 쓸 수 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블로그는 어설픈 ‘맛집’ 탐방기와 아마추어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한 이미 황석영ㆍ성석제처럼 글재주 좋은 많은 작가들이 음식에 대한 책을 썼다. 그런 글들은 주로 기억과 개인적 취향을 주제로 한다. 한편으로 <헝그리 플래닛-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는 세상의 그러한 글쓰기와 사진 찍기의 궁극에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그런 류들과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잡아먹거나 사먹는가, 그리고 거기에 얼마나 돈을 쓰고 어떻게 요리하는가? 또한 누구와 같이 먹으며, 먹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는다. 먹는 일을 둘러싼 관계만 ‘문화-정치’를 드러낼 수 있다.

세계 24개국, 30가족(주로 중하층이라 설득력있다.)의 600끼니를 직접 탐방하고 유머러스한 기행기와 질 높은 사진으로 담은 이 책은 ‘굽고 삶고 볶고 튀기’는 잡식동물로서의 인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고서임에 분명하다. 또한 먹는 일을 둘러싼 모든 민감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인 현안을 대부분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세계정치, 역사와 문화전통, 세대와 계급의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패스트푸드 제국주의, 육식의 윤리성, 당뇨와 식품자본, 바다 윤리 등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수십년 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년간에 걸친 ‘프로젝트’로서 씌어진 이 책은 그래서 외국에서 이미 여러 가지 상을 받았을 것이다.

 ***
‘지금’, 그러나 완전히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 하에서 살아가는, 그러나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세계의 ‘인간’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글+사진)는 꽤 충격적이기도 했다. ‘타인의 삶’이 거기 확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가자미를 미역국에 넣고 끓이는가 아닌가, 김장김치에 갈치를 넣어도 되는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화해’가 쉽지 않은 차이도 거기 있다. 

에콰도르와 그린란드의 가족들은 내가 평생 절대 못 먹어볼 거 같은 희귀한 음식들을 먹는다. 기니피그 훈제 고기와 바다표범 스튜, 북극곰 고기 등. 해마, 염소불알, 불가사리 튀김 같은 중국 음식들은 그래도 멀지 않은 미래에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국과 인도의 어떤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을 주로 먹는다. 쌀을 먹지 않고 빵으로만 탄수화물 섭취원을 삼는다거나 브라만계급이라는 이유로 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다. 

한편 차드와 부탄의 가난한 가족들은 너무 못 먹는다. 수단에서 쫓겨난 차드 피난민들이 먹거리를 위해 쓰는 돈은 일주일에 1,120원이고(나머지는 유엔지원으로 나오는 배급품) 부탄에서는 4,620원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어떤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너무 못 먹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질 낮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대량생산되어 급하게 칼로리를 공급하는 맥도날드ㆍKFCㆍ버거킹ㆍ타코벨에서 만든(또는 배달한) 치킨과 피자, 코카콜라를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다. 미국인들이 패스트푸드에만 쓰는 돈은 부탄 사람들 전체 식비의 10배나 된다. 배운 중간층인데도 그렇다. 미국인들의 식생활은 너무도 강력한 식품자본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끔찍한 식생활과 그 결과(소아 당뇨비만, 성인병 등등)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 

먹는 일의 평등과 불평등은 정확히 주변부와 중심의 차이, 그리고 지역 내부의 계급적 격차를 반영해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주에 결부된 일상문화가 얼마나 큰 정치적 문제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슬로우푸드와 거리 음식, 가정요리, 채식 등의 앞날은 어둡다.

미국식 식문화에 저항하는 일, 그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스크린쿼터문제처럼 ‘문화다양성’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이는 비단 ‘좋은 차이’를 보존하는 중요한 일뿐 아니라, 자본이 삶의 모든 것을 규율하는 미국식 삶에 반대하는 것과 연관이 깊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 잘 안 보인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죽고사는 문제(건강)와 바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http://blog.naver.com/heutekom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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