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인정투쟁'과 민주화 시대: 호네트와 강준만

'인정투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주제의 원천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개인적으론 지젝 이전에, 읽히지 않는 헤겔을 그래도 읽어보려고 애쓰면서 자료들을 모으고 했던 건 순전히 이 테마에 관해서 뭔가 글을 써보기 위해서였다.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제목으로(조만간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유효한 프로젝트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간명한 소개서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동녘, 1996)이고, 이와 관련한 연구서 서너 권을 나는 갖고 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1949년생이고, 하버마스의 수제자로서 현재는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소위 3세대 프랑크프루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방한한 적이 있다). 물론 예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니지만. '사회와 철학연구회'의 사회와 철학 시리즈 중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에 그의 대담이 실려 있다. 내용 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종합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잠시 옮겨본다.

질문: 당신은 <인정투쟁>에서 인정투쟁 개념이 푸코의 이론적 성과를 의사소통 이론 속에 통합시키는 개념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인정투쟁 개념으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결함은 무엇인가?



 

 

 

답변: 나는 인정투쟁 이념을 통해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관심을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의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모든 형태의 공동체, 모든 형태의 사회를 항구적 투쟁의 일시적 휴전상태로 보려는 데 있다. 즉 푸코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은 투쟁이며, 기존의 질서는 단기적인, 일시적인 휴전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에게는 투쟁의 동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분석이 결여돼 있다. 홉스와 니체의 유산을 이어받은 푸코는 사회에서 투쟁하는 이유를 자기본존을 위해서나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학적으로나 사회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아마도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의사소통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는 하버마스의 이념에 헤겔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투쟁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은 개별자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사회 속에서 투쟁한다. 이 점이 바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인정투쟁 모델은 의사소통이념과 투쟁이념을 결합시킨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모델을 갈등이론과 충분히 결합시키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개인의 사회화 과정이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투쟁의 요소가 자주 사라지곤 한다. 하버마스는 부명 의사소통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빈번히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때문에 요구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푸코의 최대의 결함은 그가 투쟁의 동기를 너무나 홉스적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자기보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니까 호네트의 이론적 기획을 요약하면 푸코(투쟁이념)과 하버마스(의사소통이념)를 접속시키는 것이겠다. 덧붙여서, 그의 학문적 '아버지' 하버마스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게서 성장한, 이제 어른이 된 제자이다. 그러나 배신자이거나 살부를 감행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성장한, 그러나 자립적 사고를 감행한 그의 아들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생각은 계승발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보완은 아니다. 결코 보완이나 단절은 아니다. 나는 하버마스가 기초한 프로젝트를 자립적으로 계속해서 사고한 것뿐이다..."

호네트가 푸코나 하버마스보다 더 멀리 가기를 기대해보지만, 아직 '후속타'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아 아쉽다(우리 '통신원들'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주제에 관하여 내가 당장에 보탤 말은 없고, 대신에 작년에 여름 <한겨레21>(05. 08. 11)에 실렸던 '우리시대의 마당발' 강준만 교수의 기고문 "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을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추려보겠다. 부제로 붙어 있는 건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였다(인용문에서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편 그의 책들이 예외없이 올해도 '행진'을 시작했는데, 첫타자로 나선 책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3>(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사람들은 왜 인정투쟁에 빠져드는가"란 꼭지가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성싶다. 나머지 책들은 관련서들과 '인정'을 모티브로 한 처세서들.

 

 

 

 

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그러니까 인정욕구는 생물학적 본성은 아니더라도 이차적 본성쯤은 되는 듯하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내가 이 글을 치고 있는 PC방 옆자리들에도 초등학생들이 죽 늘어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나 같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나 백수들 외에 PC방에 죽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저소득층 자녀들인 듯싶다. 집에서 오락을 할 만한 처지가 못되는 수준일 테니까. 해서 이들의 안쓰러운 유해환경은 '오락'이 아니라 오락실의 '탁한 공기'이다. 한번이라도 동네 PC방에 들러본 부모라면 담배 연기 자욱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내돌리지 않으리라. 요즘 떠오르는 화두대로, 건강의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반복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끝)

 

 

 

 

전반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발빠른 진단이다. 더불어 또다른 숙제까지 떠맡게 하는. 내가 임의로 골라본 참고서들이 숙제 해결에 도움을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티티테인먼트와 더불어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염려하고 공부해야 할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06. 01. 24.

P.S. 이렇듯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나대로의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문득 반성하면서, 이성복의 '서시(序詩)'를 떠올려본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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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62)

몇 년전부터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담론, 혹은 키워드는 '파시즘'이다(최근엔 보다 '대중적'인 버전으로 '대중독재'란 말도 쓰이고/퍼지고 있다). 흔히 스탈린이즘과 함께 전체주의의 두 축을 이루는 이념으로 지칭되는 파시즘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권위적 국가주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가 결합된 형태인데('대중독재'란 조어는 그 두 가지항을 결합한 것이겠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응원열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란 표현을 썼고, 최근에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일부 열성적인 '황빠'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란 표현을 갖다붙였다. 당초 '파시스트'란 말은 아마도 최대의 경계와 경멸을 담은 어사였을 텐데, 이젠 다반사로 쓰는 말이 돼 버린 것. 나의 일상, 나의 파시즘? 

 

 

 

 

그만큼 '파시즘'이란 용어가 '일상화'되었다는 뜻이겠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는 줄기차게 우리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주장해온 임지현 교수가 아닌가 싶다(거기에 강준만 교수의 개마고원팀들이 가세했다). 좁은 견문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일상적) 파시즘'은 아마도 계간 <당대비평>의 최고 히트상품일 것이다. 최근엔 김상봉 교수까지 <도덕교육과 파시즘>(길, 2005)으로 무장하고서 이 '반-파시즘' 대열에 가세했다. 한 용어의 이러한 일반화/일상화는 한편으로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하면서(대한민국이 파시스트 국가라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도록 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을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순치시켜버린 면도 있다('항시적' 파시즘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현 '노빠 정권'이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정권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을 무능력하고 무기강적인 정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지지율이 30%를 밑도는 '국가주의'도 있나?).

해서, 현재의 '파시즘 인플레'는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파시즘을 권장하고 장려한다(왜? 일상적 파시즘은 견딜 만한 파시즘이니까. 견딜 만한 것이 아니면 일상화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모든 근본주의는 서로 공모하기에(주사파들이 조갑제류가 되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본래 조갑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에. 박정희주의나 김일성주의나 그게 그거니까. 모두가 '인민'을 위해 애면글면했다. 단, 차이라면 뭔가 꿀리는 게 있었던 '친일파'는 어떻게든 먹여살렸지만 너무도 당당했던 '항일투사'는 인간 주체라는 게 먹고만 사는 거냐라고 내내 '교시'했다는 것. 말하자면, '배부른 돼지' 대 '배고픈 주체' 간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무용하다거나 임지현 교수의 작업이 오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이론은 의미론과 함께 화용론을 가지는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옳은' 이론이 화용론적으로, 즉 실제 현실상으로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것(이론적 순결주의자는 교리적 근본주의자의 세속적 버전일 뿐이다). 사실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의 조합은 인간적인 결함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런 모양'을 기대하신 건 아닐 테니까.  

 

 

 

 

이야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최근에 임지현 교수의 파시즘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던 책이 출간됐고, 나는 그냥 그 책에 대해서나 말하려던 참이다. 빌헬름의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이 그 책이다. 임교수는 책의 뒷표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좌파 교과서의 정답을 무시하고, 파시즘의 복합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를 일반적으론 '프로이트 좌파' 혹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해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혁명 러시아에서 곧 기각된다). 이미 작년에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2005)이 출간됐을 때 라이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대신에 횡적으로, 작년초에 출간된 책으로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듣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겠다는 의견 정도를 덧붙인다. 심리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팩스턴의 <파시즘>은 6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게 좀 부담스럽다면, 마크 네오클레우스의 <파시즘>(이후, 2002)로 때우셔도 해도 좋겠다. 1/3 정도의 분량이다. 얼마전에 나와서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강유원의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에는 한 장에 파시즘 관련서들에 대한 서평에 할애돼 있다.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라이히의 파시즘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책으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2006)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괴벨스의 본격 평전인 이 책은 괴벨스의 일기와 그가 쓴 소설, 연설문,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괴벨스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파헤쳐 들어간 탁월한 나치 심리의 해부서"라고 하니까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조해볼 만한다.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가 '파시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때, 괴벨스의 공적은 그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선전선동(=아지프로)전략을 개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은 파시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선전선동은 현실민주주의에서도 이미 '파시즘'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니까.

 

 

 

 

괴벨스를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빼놓을 수는 없겠는데, 관련서들은 막스 피카르트의 <우리 안의 히틀러>(우물이있는집, 2005)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서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히틀러에 대한 신화적 분석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2003),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서 <히틀러의 정신분석>(솔출판사, 1999)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거기에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 1998)과 <히틀러 최후의 14일>(교양인, 2005)도 덧붙일 수 있겠다(바람구두님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30분에 읽는 히틀러>(랜덤하우스중앙, 2004)라면 히틀러에게 너무 야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당신이 이 참에 <나의 투쟁>까지 읽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리겠다.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요?" 

 

 

 

 

두번째로 꼽을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두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렝 핑켈크로트(팽켈크로)의 공동저작인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동문선, 2005). 작년말에 나온 책인데, 최근에서야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뤼크네르의 책은 <비터문>(산하, 1993) 등의 소설을 포함해서 여러 권의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읽은 가장 압권은 역시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었다. 핑켈크로트의 경우도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 같은 뛰어난 에세이들이 소개돼 있고(아래 사진은 영화 <비터문>의 포스터).

각자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지만, 내가 알기에 두 권의 공저도 쓰고 있는데, 한때 내가 구했던 책은 <새로운 사랑의 혼돈>이었지만 이번에 <길모퉁이의 모험>이 먼저 나왔다(전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른 가늠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저자들의 지명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물론 번역서의 경우엔 역자를. 한데 역자의 책을 내가 읽은 게 없다! 브뤼크네르의 <번영의 비참>을 약간 읽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차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장이다. 그러니까 '일상'이 전면화되어 있는 셈인데, 일상에서의 모험이란 사실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이 모험이듯이(한가지 곁들이자면 동문선 책 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세번째 책은 송태현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책 자체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제이며 세 명의 상상력 '이론가'들과의 조우를 한번쯤 권하는 의미에서 꼽아본다.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듯하기 때문에. 융이나 바슐라르 관련서들은 우리 인문학 현실에선 '과다'할 정도로 여러 권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에(가장 얄팍한, 그래서 읽기에 간편한 책 몇 권만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한때 소개되다가 주춤하고 있는 질베르 뒤랑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저자 자신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 받은바, 뒤랑은 상상력이론과 신화이론에 있어서 (바슐라르파와는 또 구별되는) '그르노블학파'의 수장이었고, 국내에도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여럿 된다.

 

 

 

 

대표적으론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83)을 처음 번역/소개한 진형준 교수를 들 수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문학과지성사, 1992)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오래전에 둘다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번역서보다는 우리말 저작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이후 뒤랑은 진형준 교수가 관여하기도 했던 계간지 <상상>과 살림출판사쪽이 '전담'하게 되는데,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심층사회학을 위하여>(살림, 1998)이 유평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이어서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원제는 '상상력')>(살림, 1997)이 다시 진형준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다. 같은 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도 진형준 교수 등의 편역으로 출간되고(덧붙이자면 유평근, 진형준 교수의 <이미지>(살림, 2001)도 이런 맥락상에 놓여 있는 책이다). 뒤랑의 상상력론이 한국문학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진형준 교수의 비평집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장 최근의 평론집인 듯한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은 읽어보지 못했다).   

 

 

 

 

네번째 책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한길사, 2005). 라 로슈푸코(1613-1680)에 관한 책으론 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꼽아본 책이다. 이미 <고야>와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바, 저자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문화사나 지성사쪽의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언젠가 몽테뉴를 <인생에세이>를 소개하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요시에의 <몽테뉴>를 꼽은 적이 있는데, <라 로슈푸코>도 보태야겠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라 로슈푸코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과 동시대인이고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보다는 두 세대쯤 아래 연배이다. 저작으론 원래 <잠언집>이 유명한데,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나무생각, 2003), <광우예찬, 군주론, 방법서설, 잠언과 성찰>(을유문화사, 1995)에 실린 '잠언과 성찰'이 있다.

 

 

 

 

끝으로 남아공의 여류 극작가 레자 드 왯(Reza de Wet)의 <러시안 트릴로지>(예니, 2005). 출간된 책들은 많지만, 손가락은 한정돼 있고 또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내 눈길이 '러시안'에 머문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이 희곡집이 체홉의 주요 희곡 <세자매>, <바냐 아저씨>, <갈매기>를 토대로 그 주요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그렸다는 것밖에(그러니까 '후일담 희곡'이다). 나로선 그걸로도 충분히 흥미롭다(아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레자 드 왯, <세자매> 영화스틸, 데이빗 마멧과 그의 <세자매> 원서이다).

소개에 따르면, "<세자매2>는 체홉의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그 격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올가, 마샤 그리고 이리나 세 자매가 갖고 있는 열망과 희망이, 또 그들의 고귀함과 선량함 혹은 그들의 무지가 어떻게 비루해지고 전락해 가는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원작인 <바냐아저씨>의 8년 후를 배경으로 혈연과 애정, 결혼으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이 사랑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호숫가에서>는 원작 <갈매기> 4막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숫가에 있는 집에 다시 나타난 니냐의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보인다."

이미 번역/출간돼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일 건 이번에 미국 연출가 데이빗 마멧의 번안작을 옮긴 <세 자매>(예니, 2006). "체홉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고, 공연하기에 적합한 글로 새롭게 썼다"고 하니까, 이 또한 흥미를 끌 만하다. 

 

 

 

 

P.S. 그밖에 눈에 띄는 우리 저자들의 책들은 나중에 몰아서 다루기로 하고, 세 권 정도만 덧붙여 '언급'하도록 한다. 먼저,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란 부제를 가진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아마도 지난주에 이 페이퍼를 썼다면 제일 먼저 꼽았을 책이다. 하지만 이미 주간베스트에도 오를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내 말은 군말 정도이겠다. 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소개대로이다. '곱게 미친 사람들'로 보면 되겠다("미치려면 곱게라도 미칠 것이지!"란 요구를 그래도 잘 수용한 사례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책소개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간혹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내게도 어쩌면 '젠틀 매드니스'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분량도 분량이고 역자들도 역자들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우리의 경우 혈통과 무관하게 이들의 조상은 아마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표덕무, 김덕무, 박덕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번째 책은 중국화인열전의 한 권으로 나온 저우스펀의 <석도>(창해, 2006), "청대 초기의 화가 '석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전기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왕손으로 태어나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고 유민(遺民)화가로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위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살려 그림과 함께 담아냈다. <팔대산인>, <서위>에 이어 출간된 '중국화인열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내가 중국 회화에 조예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이전에 김용옥의 편역으로 출간되었던 <석도화론>(통나무, 1992/2002)에 등장하는 이름 '석도'가 그 '석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어 꼽은 것이다. 도올의 책은 부제가 '김용옥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백남준 예술론의 요체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것이다. 오래전에 백남준과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논문을 교정하느라 참조했던 책들이 문득 몇 권 떠오른다(김홍희의 책들이 표준적이었다).   

세번째 책은 <호두까기인형>의 독일작가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양>(열림원, 2006). 예전에 <스퀴데리 부인>(이유, 2002)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인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 러시아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이기에 관심이 가는 책이다. 비록 '세 자매'에 밀리긴 했지만. 호프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P.S.2.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오세철 교수 등의 번역으로 1980년대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내가 산 1987년 2판은 당시로선 고가인 8,000원이어서 상당 기간 망설이다가 구입한 기억이 있다. 어제 새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부분적으로라도) 새 번역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았다(오역들이 지적되던 예전 번역보다 못한 대목들도 더러 있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우리말 정본에 대한 기대는 좀더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06. 01. 17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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