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호로비츠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내가 이때까지 들어왔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격렬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엠마누엘 엑스-
호로비츠는 슈나벨처럼 지적이지도 않았으며 루빈슈타인처럼 원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이기적이고 의지에 가득 차 있고,
뭔가를 요구하는....... 그리고 그의 연주는 이러한 그의 인간적 특질을 보여 주었다.
-마이클 월시 <타임즈>-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에 논란을 일으키고, 다양한 평가를 받았던 피아니스트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래도록 (심할 정도로) 독자적인 음악 인생을 고수하고, 최고의 기교와 음악성을 겸비했던 피아니스트는 단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904.10.1-1989.11.5) 가 아니었을까 싶다. 글렌 굴드가 질투했던 유일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음반 매직 오브 호로비츠는 그런 그의 음악 인생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레퍼토리들로 가득하다.
예전에 음악 잡지 "객석"에 실린 조희창 기자의 호로비츠 전기문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음악을 들어 보기도 전에, 나는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기괴하고도 eccentric한 성격을 먼저 접하면서 놀랐던 적이 있다. 그 기사의 서문은 그가 얼마나 까다롭고 이상(?)한 사람인지가 먼저 설명되어 있었다.
"호로비츠라는 사람은 까다롭기 그지 없는 사람이었다. 연주회 때는 반드시 자신이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만 친다는 조건 때문에, 점보 747기로 그의 피아노를 항상 실어날라야 했다. 그 비행기는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적도 있다. 음악회는 반드시 오후 네시에, 그리고 일요일에만 열어야 했다. 비단 연주회 뿐만 아니다. 전속 요리사가 항상 연주회를 따라다니며 그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제공해야 했다. 물론 정수기를 챙겨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로비츠 자신은 자기를 <신경과민>이라고 보는 시각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피아노 연주란 내게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은 연주회 주변의 일들이다. 나는 매일 연주할 수는 있지만 매일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없다. 게다가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신념의 문제고 그렇기 때문에 전속 요리사가 필요할 뿐이다.>" 조희창, (전설 속의 거장, p.189)
이런 까다롭고 섬세한 기질은 그가 음악을 대하는 진지함에도 나타난다. 호로비츠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대중의 전폭적인 인기를 얻을 때에도 돌연 잠정적 휴식을 선언하고 침묵에 돌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위대한 지휘자 토스카니니를 만난 후 3년 간 침묵하고, (표면적인 이유는 병 때문이었다.) 다시 12년을 침묵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5년 동안 대중과 떨어져 홀로 깊은 음악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가 12년의 침묵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1965년 5월 9일의 연주회는 일명 <역사적 귀환>이라 불린다. 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던 간에, 그가 구축한 예술의 세계는 본인 스스로 겪은 침묵과 고뇌 속에 일궈진 깊은 예술의 경지만큼이나 위대하다.
매직 오브 호로비츠는 2개의 음반과 1개의 디브디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987년 촬영된 디브디는 호로비츠가 연주한 마지막 협주곡 녹음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호로비츠의 팬이라면 모두 소유하고 있을 곡들을 다시금 재탕(?)한 음반이지만, 처음 호로비츠를 접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유용한 음반이 될 것이다. 내장된 음반 소개 책자도 휼륭하다. 호로비츠와 오래도록 음반 작업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 토머스 프로스트의 소감과 간증이 들어있고, 호로비츠 자신이 쓴 "연주의 기술(art of performing)"이라는 작은 에세이가 눈에 띈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호로비츠의 연주가 왜 평생동안 사람들의 논란에 서 있었는지에 대한 그의 반론과 정당성이 논리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음악의 "낭만적인" 해석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줄곧 나는 평생동안 모든 시대의 음악을 '낭만적'이라고 간주했다. 물론 음악의 형식적인 구조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객관적이고 지적인 요소가 포함되지만 연주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주관적인 재창조의 과정이다."
이 에세이의 말미에서 호로비츠는 재창조 작업을 하는 연주자가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첫째, 훈련과 연습을 통해 날카롭게 가다듬은 정신과 상상력, 둘째,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셋째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기술이다. 그는 에세이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갖추고도 예술적 절대경지에 이르는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평생동안 고통스럽게 노력해 왔다." (호로비츠, 연주의 기술 from the Magic of Horowitz liner note)
그가 이룩한 예술의 경지는 이렇듯 냉철한 자기 훈련과 피나는 노력으로 견고해진 것으로, 그의 레코딩 작업 방식이나 레퍼토리 선정에도 이러한 완벽주의적 기질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호로비츠가 레코딩에 임하는 방식은 항상 필요 이상의 레퍼토리를 준비하고 녹음하여 그들 중에서 버리기를 거듭한 끝에 최종 프로그램을 짜는 식이었다. 그가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555곡을 녹음했을 때 이를 지켜본 토마스 프로스트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보았습니다. 호로비츠는 그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완벽한 선곡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555곡의 소나타를 거의 모두 두 번씩은 녹음했을 겁니다." (조희창, p.201) 호로비츠는 자신의 임종 4일 전까지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모짜르트 소나타를 녹음하였고 이는 소니에서 <라스트 레코팅>이란 타이틀로 발매 되었다.
호로비츠는 글렌 굴드, 미켈란제리, 그리고 리히터와 함께 명료하고 독특한 피아니 음색을 가진 몇 안되는 피아니스트 중에 하나이다. 첫 곡인 리스트의 왈츠 카프리스에서부터 그의 장기인 폭풍적인 포르테와 뛰어난 아티큘레이션과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모짜르트 콘체르트를 연주할 때 빛을 발한다. 그가 평생 존경해 마지 않았았던 모짜르트 작곡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은 호로비츠의 천진난만함과 풍부한 감수성이 만나 독특하게 해석된다. 호로비츠는 모짜르트의 음영 (contrast)을, 가볍고 무거운 음색 및 분명한 다이나믹의 전환, 또 리듬 처리로, 그리고 (약간은 과장된 듯히 느껴지는) 루바토로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런 그의 시도는 음악의 골격 안에서 꽤 균형 잡혀 있어 듣는 이들에게 이질감을 주지는 않는다. 특히 디브디에서 시종일간 유머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또 형언할 수 없는 위엄과 진지함으로 연주하는 최만년의 호로비츠와 오페라 전문 지휘자인 줄리니의 협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음반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슈만의 "크라이슬러리아나"에서는 건반을 오가며 포효하는 화려한 테크닉과 함께, 고뇌하며 방황하는 젊은 예술가 클라이슬러의 격정을, 또 다른 슈만의 곡, "트로이메라이"에서는 눈가를 적시게 하는 감동과 애틋한 아픔을 선사한다. 이 음반의 최고의 백미는 바로 바흐-부조니 편곡의 코랄 프레루드,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어서 오소서, 이교도의 구세주여)이다. 한없이 고개를 숙인 채 건반을 파고 들며, 고독에 침잠한 수도사처럼 이 짧은 코랄곡 속에서 호로비츠는 자신의 인생과 삶의 비애를 모두 드러내는 듯 하다. 가장 진실한 호로비츠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이 곡에서가 아닐까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