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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ㅣ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6월
평점 :
“유다이 말이 맞아. 난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인지 모를 녀석이야. 이루마는 적어도 경주마인 서러브레드고, 그런데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 경마에는 뜻밖의 결과라는 게 있잖아.” (p. 54)
나는 음악가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오만하게 굴려는 건 아니지만, 음악 관련된 소설은 잘 보지 않는다. 이유는, 음악 소설들은 대부분 작가의 환상을 바탕으로 쓰여 현실과 거리가 있거나, 지나치게 통속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라이벌끼리의 암투 (상대방의 악기 줄을 끊어 놓는다든지, 박살내놓는다든지, 빽, 연줄, 콩쿨 등 다뤄지는 얘기의 범위가 한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소설에서까지 음악을 읽고 싶진 않다. 활자로 전해지는 음악의 감동은 실제로 듣는 것, 보고 느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활자로서의 음악은 믿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악보는 또 다르다). 음악은 작곡가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연주자의 심장으로부터 내게로 전해지는, 즉 어떤 spiritual 한 것으로 신성시하는 마음가짐 때문인지도.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는 아이치 현 음악 대학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이다. 내게는 온다 리쿠의 ‘여섯 번째 사요코’ 이후 두 번째로 접한 일본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에 대한 내공은 전혀 없고, ‘추리소설의 진리는 셜록 홈즈뿐이다’라고 강하게 뇌리에 찍혀 있는 내게 이런 소프트한 추리소설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추리소설이지만, 유혈이 낭자하거나 섹스나 성애가 드러나지 않고 오직 ‘음악’이라는 골자를 중심으로 우아하고 고전적으로 쓰는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필력은 참 좋다. 문장엔 군더더기가 없지만 음악을 묘사할 땐 아름다운 구슬을 꿰어 넣듯이 아름답고 찬란한 빛깔을 발한다.
작가가 특별히 공을 들여서 묘사한 두 곡은 이 소설의 핵심이 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또한 소설 첫 장면에 나오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서 팀파니의 디테일까지 묘사한 작가의 관찰력과 꼼꼼한 자료 조사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주인공은 기도 아키라이다. 그는 비르투우소 학과 (이 소설에선 그렇게 되어 있다;.) 졸업반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보는 바이올린 악기에 대한 이해라던가, 연주법 등이 꽤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심지어 바이올린 악파에 대한 작가의 서술도 전공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상당히 정확하고 섬세하다. 굳이 내가 첨부하자면, 바이올린의 보잉 또 보우 그립 (활을 잡는 방식)에 관해선 크게 아우어 (하이페츠, 밀스타인 등을 길러낸 러시아의 명 선생), 프랑코 벨지안 (비외탕, 뒤부아 등을 계보로 한 벨기에 쪽 악파.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로 아르투르 그뤼미오), 갈라미언 (마이클 래빈, 정경화, 주커만 등을 키워낸 명 선생) 등의 스쿨이 있는데, 특별히 기능적인 차이나 소리에 구별이 있다기보단 활을 잡고 쓰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뿐이라고 보면 된다.
Bowing은 어떤 스쿨을 막론하고 레가토를 잘 쓰는 것과, 활이 가진 잠재력을 바이올린 기술로써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가 관건인데, 개인의 연습과 기량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가 얼마나 세심하게 소설에 담았는지 보시라.
“아우어 식은 활대를 집게 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세게 누르는 방법으로, 유연성이 다소 떨어지긴 해도 음색이 풍부해진다.” (p. 307)
“갈라미언의 보잉은 손가락과 손목을 유연하게 해서 손가락으로 활을 조절하는 것이 특징인데, 기본자세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유연성이 있지." (p. 307)
또한 음대생 혹은 예술가의 팍팍한 현실과 배경, 재능에 따른 좌절, 연주에 관한 attitude 등의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음악의 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웃을 만한 사람에게는 웃어 주지만 그 밖에 다른 사람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은 말을 음표로, 목소리를 선율로 바꿔 청중에게 선보이고 당연히 보수를 받는다.” (p. 30)
"음악으로 먹고 산다는 것이 공상 같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요.“ (p.57)
"다들 자기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가수를 꿈꾸는 사람, 운동선수를 꿈꾸는 사람, 오직 자신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이야. 그런데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신을 알고 있는 녀석과 모르는 녀석만 있을 뿐이지. 자네는 과연 어느 쪽이려나?“(p. 60)
“전쟁터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지. 청중이 없으면 얻지 못하는 기술도 있어. 그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불안을 감추고 무대라는 전쟁터로 올라가지. 자네는 이미 무기를 갖고 있고 나는 싸우는 법을 알고 있어. 자, 자네는 도망갈 건가, 아니면 나와 함께 싸울 건가?” (p. 293)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는 작가가 창조한 ‘미사키 요스케’라는 피아니스트 겸 탐정(?)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다. 첫 작이 ‘안녕, 드뷔시’인데 그 책은 사두고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곧 읽어볼 셈이다.
왜냐면 미사키 요스케라는 남자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여성 독자를 겨냥한 듯 쿼터 혼혈인 그의 외모나 눈동자에 대한 묘사가 그가 연주하는 선율만큼이나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리고 말도 얼마나 논리적으로 잘하는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소년 탐정 김전일’에 등장하는 도쿄대 출신 엘리트 경시인 아케치 켄고를 좋아하는데, 살짝 그 느낌이 묻어나 더 호감이 갔다.
아, 이제야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어느 날, 아이치 음악 대학이 보유한 2억엔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가 돌연 사라졌다. 보관실은 밀실 상태였다. 이후 범인은, 음대의 학장이자 라흐마니노프 스페셜리스트로 정평이 나 있는 피아니스트 쓰게 아키라 학장의 스타인웨이도 망가뜨리고 그에게 살해 협박 편지까지 보낸다.
여러 가지 속사정과 사연을 떠안은 채 소설은 범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추리의 비율보단 졸업반 음대생의 현실과 예술가의 고뇌, 음악에 대한 풍부한 묘사, 그리고 연애의 감정이 녹아져 있어서 정통 추리소설이라기보단 추리가 섞인 대중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부담없이 추리 소설에 입문할 독자 혹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소설이다. 나같이 취향 분명하고 편식하는 사람도 미사키 요스케란 매력적인 인물의 다음 여정이 너무도 궁금하니까. 그는 마지막까지 이런 매력적인 대사를 남긴다.
"지금부터 너희들 한 명 한 명은 소중한 사람을 향해 연주하는 거다. 그 사람에게 들리도록. 그 사람의 가슴에 가닿도록.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즐겁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 그것이 음악의 원점이거든.“ (p. 315)
이 소설은, 불안정한 예술가라는 정체성 안에서 가장 예술적인 최후의 무대를 만들어낸 말뼈다귀 인물들의 얘기를 담고 있다. 어렵고 조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켜온 예술가의 신념, 특히 아키라의 현을 짚는 왼손과 활을 잡는 오른손은 미래를 향해 내뻗지는 못해도 바로 여기, 지금 음악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증명이 되는 것으로써, 존재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키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음악은 직업이 아니다.
음악은 삶의 방식이다.
연주로 생계를 꾸린다거나 과거에 명성을 떨쳤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지, 그 음악이 청중의 가슴에 닿았는지 그것만이 음악가의 증거다.” (p.331)
아키라가 이렇게 결심하며 성장하는 것과, 스트라디바리우스 도난 사건의 흑막과 진실은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안에 섬세한 선율처럼 수놓아져 있다.
지금부터 너희들 한 명 한 명은 소중한 사람을 향해 연주하는 거다. 그 사람에게 들리도록. 그 사람의 가슴에 가닿도록.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즐겁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 그것이 음악의 원점이거든. (p.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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