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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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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정치권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대중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자의로 인한  의사표현 비참여가 아닌 타의로 인한 주변화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곧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시민을 '고객'으로 혹은 주권자에서 '자원 봉사자'로 여기고 있으며 본래의 민주주의는 점점 더 개인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책 표지에는 'DOWN SIZING DEMOCRACY'라는 문구가 성조기 위해 적나라하게 새겨져있다.  세계 최강대국의 국기에는 긴 줄에 다섯 사람이 매달려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다른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제목 위의 작게 새겨진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라는 문구는 이런 음울한 분위기에 외치는 작은 반향의 외침같다. 


미국정부의 '재창조'는 시민을 '고객'으로 재창조했다. 정부는 집단 동안보다는 에너지가 덜 드는 대안으로, '이해 당사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쉽게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다. 정부 자신의 기능만이 아니라 대중 자체를 개인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치는개인민주주의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에너지가 덜 드는 대안'이라는 대목이 정말 흥미롭다. 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의 투표로부터 성장해왔다. 그런데 현재 미국 정부는 이런 시민들의 참여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즉 에너지가 덜 드는 대안을 찾은 것이고, 시민은 '고객'으로 재창조 되었다. 정부는 고객에게 집단 행위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플랫폼을 수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여론 주도층' 주위로 시민들이 결집할 기회를 줄였다. 시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민주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시민권'이 가지는 본질, 즉 피치자와 국가의 수직적관계를 넘어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묶어 줄 수 있는 혈연, 신념, 문화적 유대 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시민의 동의없이 시민을 '고객'으로서만 존재하는 플랫폼을 만들도록 놓아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대 이후 시민에 대한 정부의 의존이 절대적으로 약해져왔다. 

 정부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전쟁을 수행하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열정적인 시민들은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되어 버렸다.
정말 무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더이상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결집은 정부의 목적을 방해할 장애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니. 각자의 이익을 좇아 '개인'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그 국가 자신의 운영 이상으로 원대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개인민주주의는 시민권의 중요한 특성들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더 이상,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기업같다. 다만, 단지 그뿐인것인가? 시민들은 개인화되고 있다기보다도 '주변화'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원제 <How America Sidelined Its Citizens and Privatized Its Public>처럼.

이른바 '정치 엘리트'들은 오히려 대중참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것이 통치를 위한 유일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옛날과 같이 시민군, 시민행정관, 시민 납세자의 협력 없이도 통치가 가능해졌다. 곧, 유권자의 표를 버리는 것도 쉬워졌다. 저자는 유권자의 입장 고려없이 미국의 양당이 충분히 서로를 공격하고 몰아낼 수 있었던 예시를 든다. 정말로 '유권자는 미국 정치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흔적기관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수단으로써는 '과세방법의 진화', '법원에서의 소송' 등의 무기가 있었다. 법원은 더이상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자리가 아니라 소송으로 얼룩지고, 정치는 협소한 이익을 좇아 소송으로 만들어진 공모된 거래로써 법원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저자는 대표 없는 과세의 중요 사례로서 담배 협정에 관한 속내를 생생히 보이고,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의 일부가 배제된 채 법적절차를 통해 승인된 것이라 지적한다. 의사결정의 외곽으로 밀려난 것이다.

최근 수십년 동안, 한때 정치투쟁을 위해 유권자 대중을 조직하고 활성화했던 정치 엘리트들이 불행하게도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수단을 발견해 왔다. 그들은 법정, 관료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 '내부자' 이익집단 정치에 의존하고 있다.
책 전반에 계속해서 이런 주장이 숨어있다. 환경단체의 '개인화'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이상 환경단체는 대중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권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과 같은 추상적 이해관계를 다루는 환경단체 대표들, 대리인들이 의도를 왜곡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환경문제는 물론 피고, 원고가 분명하지 않은 기근, 복지 등의 분야에도 해당되고 똑같이 이들을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들이 전체의 의견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과 의사결정이 결국 법원에서 소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환경, 교육, 미관, 종교 등은 중요한 '공적' 관심사이지만 대표자들은 소송에서 특수한 입장을 보여주기(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쉽다. '공익에 관한 이런 정의들은 자칭 대변인들과 판사 사이의 심의 과정에서 정부의 공식 입장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지난정부에서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인천공항 민영화, KTX 민영화 등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관심을 가지고 알아보아야겠다.)여론은 부정적인 입장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민영화는 정부의 업무를 시장으로 넘기는 한 방법이다. '민영화는 권력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얻게 해주는 도구이며, 일단 이런 접근이 허용되면 그 권력은 납세자들에게 추가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행사되곤 한다.'라 걱정하는 저자의 말은 미국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라기 보다도 정작 우리 정치에 대한 노파심같다. 책의 마지막 장 제목 <누가 시민을 필요로 하는가?>처럼 점점 개인화되고 있는 정치참여, 주변으로 밀려나는 대중이 다시한번 '누가 시민을 필요로 할지' 생각 해보아야 할 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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