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신 없는 혁명


볼테르가 사람은 위선적이라 말한지 300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게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마치 현재를 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상식인 것처럼. 그래서 존 레논이 뮤비로 국경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선생은 카르파 디엠을 외쳤다. 그리고 그 영화와 음악들은 전 세계에서 팔려나갔다. 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팝니다를 읽는다면 과연 <죽은 시인을 사회>(+명견만리) 를 보고 동감하여 교육이 문제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교육을 걱정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현안을 가진다. 세상의 모든 사람한테 질문하면 10%의 사람들만 제외하면 지구온난화가 문제라며, 극심한 부익비빈익빈이 문제라며 동감한다. 그리고 앞에서는 고민하는 척 하고 좋은 척은 한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벌목을 해서라도 때부자가 되고싶은 사람들은 넘쳐나는데(상당수가 그 10% 작자들이랑 비슷한 부류인데 연기한 인간들)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얼탱이들은 가끔 배지밀 두유나 만들거나 백신을 기부하고는 "나는착행! 내 윤리를 따라랑!" 이러면서 강연이나 나선다. 아니면 노래방이나 처 가면서 수준낮은 시트콤이나 보고는 자신의 여가의 자유라고 말한다. 장담컨데 내 생각에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이(플라톤,예수) 지금 태어났더라면 절대로 그딴 병신같은 짓거리에 여가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세상을 이해하기 


만약 천재들이 자신감 넘치게 무엇이 틀리다고 말한다면, 하지만 수백만명이 그를 팔로우 하는데도 바뀌는게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당신들이 바로 그들, 혹은 방관자, 혹은 노예다. 이제 나는 위선자, 방관자, 노예들을 무시하고 지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자 한다. 열정에 넘치는 사람은 많지만 차갑게 진실을 들쳐다 볼 용기있는 사람은 적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는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그들을 향해서 적는다. 


현실을 무시하는 방법만큼 더 빠르게 망하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바보들은 사회 약육강식 논리에 압도당해 그걸 방어한다거나 되도 안되는 변명이나 하는데,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는게 당연해서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병신짓거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튼 그래서 그 논리는 항상 대학생들의 입가에 올라 퍼지고 반대하자는 병신들만 있다. 극단의 극단 뿐이다. 여기서 큰 반전이 있는데 사실 세상에는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도 충분히 그렇게 증오하는 행동을 다른 환경에 태어났더라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 광신은 불화를 일으키고 불화는 불의를 낳는다. 알아야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열정은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진실은 바꿀 수 있다. 누구나 한번 쯤은 내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100년만 지나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인식하고는 운다. 그게 사업부 부장일 수도 있고 대통령일 수도 있고 초등학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들도 그런다고 인정하기는 싫나 보다. 암튼 이런 과정으로 자아감을 더더욱 키어가고, 결국 누구나 경험하는 평범한 일로 나는 특별해, 철학적이야, 깊어 이딴 의미없는 자존감만 세운다.


이런 관점, 철학적 관점이 한번 생겨나고 그걸 계속 추구할 지력과 여유가 있었더라면 십중팔구 역사를 파게 된다. 나같은 인간이 넘쳐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누구나 아니깐. 또 관념보다 사실을 사랑하는 성향이라면 과학도 추구하며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더 가까운 답을 갈구하게 된다. 또 더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책도 읽고 똑똑해!" 라고 말하기 보다는 "내가 똑똑하다면 다른 사람들도 똑똑하게 만들자!" 라는 착한 생각도 한다. 물론 의심도 넘치는 사람이라면 내가 과연 똑똑하냐고 자문하고, 사실을 사랑한다면 데이터를 가져와서 내가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한게 뭐냐고 자문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비완벽하다며 상대주의에 빠져서 낭만주의, 쾌락주의, 염세주의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데 그러는 사람이 무척이나 적은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때돈버는 딱히 지혜롭지 않은 대중지식인이 있을 뿐이다. 

















3. 현실적인 데이터

31% 직장 불만족. 고학력자의 선진국 쏠림. 발명이 금융의 3배 경제효과. 환경을 망치면 뒤진다. 

또 현재 시스템이 좋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바로 저자들도 그걸 원하지 않을 거다. 웨이터로 일한다거나 재철소에서 일한다는거 자체가 인적자원의 낭비다. 제 2의 아인슈타인, 조지프 히스, 나같은 학생들이 죽어나간다. 루트히거가 말했듯이 지금 최고의 인재들은 광고나 만들고 자빠진다. 나는 기술이든 과학이든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천재가 많아져도 대우하지 못하는 현재 대학을 볼 때(걔들 대다수가 천재도 아니지만 일단 박사가 한 해 한국에서만 만명정도 나온다) 오히려 이걸 고민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청부업자 전문가와 염세주의자, 만능주의자 인간들은 교육이든 뭐로든 없애야 한다. 아니면 선민주의 깨작거리는 자칭 엘리트들도. (오해하지 말기 바라는데 한국만 보더라도 꽤 많은 관료, 기업인, 고소득층이 나향욱 사건 터졌을때 비판했다.)
















4. 그래서 어쩌라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갖는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는가? 이제는 모든 인류가 그리스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성과를 향유한다. 하지만 대중은 그것을 자연스런 원시밀림같이 보고는 어느 시대에나 권력자라는 악과 피억압자라는 선만을 본다. 망치에게는 모든것이 못으로 보이듯이, 광신은 불화를 낳고 불화는 불의를 낳듯이 이는 지난 세기 오만방자한 대중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세계전쟁을 가져왔다. 또한 일부 선대 철학자들의 한계, 혹은 실수로서 대중의 교육을 실질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책임이 있다. 돼지가 아닌 인간이 될 교육이 부재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무지한 인간들이 넘쳐난다. 동아시아의 주입식 교육은 그들에게 당장은 혜택을 가져왔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는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토끼굴이 되었다. 처음부터 덜 성급하게 했더라면 PISA최상위권을 휩쓸지 않고 노벨상 수상에서(과학제외) 최상위권을 휩쓸었을 것이다. PISA가 상위권이면 무엇인가? 서양인을 원시밀림에 가져간다면 2000년이 지나서 과학문명이 나오겠지만 동양인들은 수천년을 원시밀림에 살더라도 나오는 것은 기생방이나 쫓아가는 병신들의 세상일 뿐이다. 질문하겠다. 기계로서 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무지와 광신과 우울함에 빠져 살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초반을 방황하더라도 확실한 도덕과 이성을 가지고 살 것인가? 전문성의 세계에서 교사와 정치인과 법률가들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기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빛을 지고싶지 않을 것이다. 배부른 돼지로 살 것인가?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고 잘난척이나 하면서 살고 싶은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risDaeron 2018-11-1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하게도 여기서 대중은 오르테가식의 대중이다.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로의 글을 접하고 나중에 프리모 레비를 접했다. 그때 마음이란 통곡이었다. 인류는 언제나 멍청한가. 100년동안 바뀐것이 없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하나하나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이 책이 나오고 50년동안 바뀐 게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risDaeron 2018-11-0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일단 두 가지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첫 번째, 현실에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오로지 분파적 이익뿐이며 사회 전체의 전반적 이익이란 결코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것으로, 인간 집단의 이익을 오로지 화폐 소득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생각이다. p.4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
로랑 베그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모 레비 "괴물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다. 언어와 이성으로 만들어진 문명사회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 전에는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장 보더라도 돌고래, 범고래, 보노보, 침팬지, 코끼리, 강아지, 까치와 인간은 무척이나 비슷하다. 애완견에게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잠시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나‘와, 주관적이고 일상의 ‘나‘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동안 이 문제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그것 모두 나이므로 분열적인 모순들을 없애보자 다짐했었다. 매사에 계산적이면 힘들고, 사유에 편협하고 유치하면 일상이 불안하다. 어찌 보면 불확실한 중용이다.


˝낭만주의(Romanticism)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정의해본다면, 낭만주의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범유럽적 문예 및 사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특성이기도 한 17세기 합리주의와 그것의 사회적 형식인 18세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세의 신(神 )‘이 앉았던 바로 그 전능한 자리에 올려 앉혔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까지도 새롭게 조명하고 규제하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드러난 것이 곧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 ‘계몽된 사회’, 그리고 마치 시계)와 같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 자연’이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답답할 정도로 편협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비합리적 또는 비도덕적 인간과 비과학적 세계를 옹호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이성보다 감성, 사고보다는 의지, 과학 보다 신화나 예술, 차가운 도덕 보다 뜨거운 열정,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론적 세계보다는 수많은 신들과 요정들이 함께 살고 있어 그것들을 변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유기체적 세계가 더 진실하고 가치있게 생각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요.˝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pp.47-49




 
계몽주의가 너무 많이 나아가서 실패했다. 언어가 이성의 토대고 숙련되기 무척 힘들다. 문명은 야만으로 떨어지기 쉽다. 사회 자체도 인류 역사에서는 새로운 것이고 거기다가 전지구적 과학적 사회는 모든 생명체가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굳이 정치에서의 데마고그만이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고 근거없이 무작정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는 싸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데마고그를 막는 방법은 전문가의 강화거나 대중의 박식함이지만 양쪽 모두 악용될 소지가 있고 한마디로 말해서 인류에게는 그럴 역량이 부족하다. 


잠시만, 그런데 그냥 모든 사람들이 똑똑해지면 어떨까? 아나키즘이 아니라, 정말 그냥 말해봐서. 카를 야스퍼스도 그의 책 <철학입문>에서 어린애부터 각기 다른 사람들이 책도 읽지 않고 그냥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고 짧게 증언하지 않았나? 리처드 니스벳이 통계수업으로 논리적 오류가 눈에띄게 줄였다고 연구결과를 내기도 했고? 이분이 말했듯이 마치 아라비아 숫자처럼 우리가 그런 도구들을 주어서 모든 사람들을 똑똑하게 만들수 있을까? 비형식적 논리의 오류도 모두 해결하고 근거없는 권위와 신비주의를 타파할 경험을 주는 것은 어떨까? 


상대주의를 말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답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 <캉디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risDaeron 2018-10-20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불평등의 대가> <기술 시대의 의사>

새로운 일이 아닌 아유는 아폴론의 그리스에도 디오니소스가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