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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이야기 1
박연 지음 / 허브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중학생 때 '르네상스'라는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 월간지를 접하고 만화에 빠져 근방의 만화가게란 만화가게는 다 훑고 다녔었다. 그때의 순례가 가끔 꿈에 나와 그리움에 몸부림치게 되곤 한다. 김진의 초기작 '내 이름은 데이빗'이나 두 권짜리 '짝궁'이나, 도통 애장판이 안나와 눈물짓게 만드는 '1815'도 그렇고. 이정애가 원고를 태워버렸다던 데뷔작 '헤르티아의 일곱기둥'도 여기서 보았고 김미림의 '르나르에게'라는 신선한 작품도. 오경아의 '청회색의 파리'나 '최고의 친구',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도.
...아, 쓰다보니 다시 그리움에 몸부림을 치게 되는고나. 한바탕 몸부림!
이때 만났던 작가 중 한명이 박연이었다. '세실의 장원'을 비롯해 제목도 잘 기억안나는 초기작들을 모두 섭렵했었다. 우울한 분위기, 지독한 성장통의 이야기를 짓던 작가가 '르네상스'에선 '발바닥만큼 한 이야기'라는 소박하지만 탐스럽게 주렁주렁 알이 달린 감자같은 이야길 지어냈으니, 그 엄청난 거리감이 박연이란 작가에게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
'르네상스'에 실린 작가 인터뷰를 보노라면 이야기꾼으로서 변화된 이유와 과정이 따듯하게 나온다. 서울 생활에 치이고 작가로서의 고민에도 치여 고향에 돌아와 그간 지나쳤던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변화되었노라고. 자연으로 치유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지만 작가로서 그걸 소화해내기란, 그것도 박연처럼 탐스런 감자알같은 작품으로 소화해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발바닥만큼 한 이야기'나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등등의 작품은 자연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은 아니다. 도심에서 약간 비껴난, 혹은 도심 속에서 어느새 이야기의 소재로 다뤄지지 않게된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소재였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 검고 보드라운 흙냄세가 얼핏 묻어난다. 식물이 자라나기 충분한 영양과 산소가 가득차있는 검은 흙. 그 흙을 바탕으로 자라날 것이 꼭 장미여야할 필요는 없는 거다.
박연은 결국 '들꽃 이야기'를 통해 애정어린 자연 이야길 풀어놓았다. 연재하고 있는 지면 '허브 HERB'에 꾸준히 실린 것이 어느새 한권 분량이 되었다. 애초에 발행일은 작년 10월이었으나 허브는 보다 내실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준비해서 지금의 책을 냈다. 용케 이 책을 구한 뒤 온라인 서점에선 일시품절이 된 걸 보니 많은 독자들이 제 때에 이 책을 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품절이 풀리는데로 꼭 구해보셨으면 한다.
연재될 때에는 없던, 작가가 손수 찍은 어여쁜 들꽃 사진이 실려있고, 컬러링 작업을 해서 흑백원고이던 잡지 때와 달라졌다. 작가가 직접 조근조근 적어둔 각 꽃과 풀의 이름 및 옛 사람들의 활용법들도 재밌다. 물론 원고 자체의 재미도 있다. 아웅다웅하는 단비네 부모님들 이야긴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시골에 교사 발령이 난 남편이 집 앞 텃밭에 심은 수박이 풍년이라며 친구들을 죄 모아 퍼주자, 수박귀신인 부인이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펑펑 울어버린다. 남편이 어떻게 했을까? 한 개도 안남은 수박에 미안해서 옆집 수박을 몰래 서리해다 부인에게 바친다. 부인은 그런 줄도 모르고 남편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수박이라며 기뻐하는데... 노인들 밖에 남지 않은 마을은, 찾아오는 이웃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그리면서 슬그머니 묘사해두는 작가. 자연 이야기와 사람 이야기를 작가는 푹 고은 곰탕 마냥 끓여담았다.
요즘 선물하면 좋을 만화책들이 많이 나오는 중이라, 만화전도사를 꿈꾸는 나같은 독자에겐 선택의 폭이 넓다. 이 책은 결혼한 친구들이나 식물을 좋아하는 회사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좋다. 또 초등학교부터 중, 고등학교 사촌동생이나 조카에게 선물하기에도 좋다. 물론 내 몫의 한 권을 빼놓아선 안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