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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베린 9 - 빛을 향해 걷다
이수영 지음 / 황금가지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다른 리뷰에 '재미없다'는 평이 많아 놀랐다. 감상이야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인간이 아닌 자의 1인칭 소설이라서, 또 여성과 남성에 대한 걸걸한 대꾸들에 거부감이 든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로선 이 유쾌한 이야기를 향해 웃음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판 걸하게 펼쳐진 광대판을 보는 이들이 깔깔거리며 박수를 치듯 말이다.
묘인족이라면 아무래도 귀 쫑긋한 고양이 인간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 종족은 야묘족으로 별도 설정되어 있다. 소설에서도 야묘족과 묘인족을 오해하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 환타지 소설답게 용과 정령과 엘프와 인간, 오크, 호빗, 오거 등등이 나온다. 그리고 작가 이수영이 창작한 야묘족, 아인족, 수인족과 고대 종족이라는 수인족, 조인족, 묘인족. 이들은 인간의 법과 관념을 벗어난 각 종족의 생리적 특성에 맞추어 각자의 법과 관념을 갖고 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자랑스러워 하며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도전하여 상대의 심장을 짓밟는 것이 명예인 묘인족에서, 500년간 도전자의 심장을 터트리며 강인한 왕으로 지내온 쿠베린. 그의 도전자 중에는 일생 잊지 못하는 아내 일렌과 존경하는 왕이던 그의 숙부, 사랑하던 형과 동생들이었다. 묘인족의 피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대한 갈망을 피하기 위해 그는 아이도 낳지 않은 채 인간의 도시에서 생활한다. 델리암 왕국의 엘리야라는 자유 상업 항구도시, 16살 가량의 미소년으로 몸을 줄인 채 생글생글 웃으며 자유롭게 튀어나오는 강철보다 단단하고 예리한 손톱을 휘두르며 지내는 쿠베린. 때로는 무료함 때문에 (고액의)돈을 받고 일을 의뢰 받는다. 그 일은 여성을 꼬여내는 엘프 답지 않은 엘프를 찾는 일이거나, 엘프 사냥꾼에게 잡혀 어딘가에 노예로 팔린 소녀 엘프를 찾거나,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호빗을 호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의 강함에 도전하는 묘인족을 맞아 희열에 사로잡혀 전투모드로 변신을 거듭하며 도전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소설은 1권부터 9권까지 약 2년 반 가량, 대륙이 룬드바르 공국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쿠베린의 모험과 도전을 이야기한다. 500년이란 긴 시간의 무게 -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과 무익한 인간들의 전쟁과 죽음에 질려버린 쿠베린은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하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진실, 진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나! 이 쿠베린 님이시다. 나로 말하면 미와 진실과 지성과 지혜의 결합체! 거기에 완벽한 육체와 완벽한 미모로 온 여신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그런 분이란 말이다!"
내가 진지하게 주절거려 놨지만 사실 쿠베린은 위의 대사를 소설에서 여러번 말한다. 그는 자학하느라 땅을 파거나 우울해서 어깨 늘어트리는 걸 질색하기 때문에 언제나 유쾌하다. 심지어 자신을 따르던 청색 아인족이 죽었을 때도 눈에 뵈는 것 없이 한 달음에 시체가 있는 들판까지 뛰어가서 펄펄 날뛰며 울어댔지만 눈물이 그친 뒤엔 "아, 배고프다~ 뭐 먹을 거 없냐?"라고 배를 긁적인다. 그런 그의 겉모습만으로 주위의 인간들은 '넌 슬퍼할 줄도 모르냐!'라며 으르렁 대지만 그도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삶의 이면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하기 때문에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산 자는 산 자라는 입장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죽은 청색 아인족의 형을 우연히 만났을 때는 그의 유령인 줄 알고 일순 마음 시큰거려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을 갖게 되었을 때는 죽은 이들을 되살리면 어떨까 하지만 보석은 말한다. '그것은 당신의 진실된 소원이 아니다. 당신이 납득한 일에 대해서는 소원을 바랄 수 없다'라고.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이라도 1년을 지키기 어려운 인간들의 제멋대로인 판단 속에서 500년간 묘인족으로서 명예를 지켜온 쿠베린은 멋지다. 비록 중간에 아이를 낳겠다며 줄줄이 여인네들을 맞아들인 대목은 좀 슬펐지만. ㅠㅠ 그의 즐겁고 때론 슬프고 때론 잔혹한 이야기를 즐겨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