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 의심 많은 사람을 위한 생애 첫 번째 사회학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월
평점 :



사회학 특강
이 책은 사회학 강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꿈을 꾸고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다 자라면서 자신이 꿈꾸고 생각한 것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고 점차 타협을 하면서 살아간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특출 난 특별한 사람에 대해서 못 견디는 분위기가 더 심하기에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듯 하다.
이 책은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을 하는 책을 뿐 비난을 하는 책이 아니다. 일단 비판과 비난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자. 비판(批判-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 비난(非難-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이다.
사회, 역사, 사실, 단어, 수치 등을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고 통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어 왔던 수 많은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지적해준다. 이 책에서 나온 대표적인 예로 커피를 들었다. 세계에서 석유 다음으로 많이 유통되는 물자는 바로 커피이다.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 하려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무차별한 폭행과 갈취로 인해서 커피와 사탕 수수 산업은 번창 하였다. 이로 인해 수 많은 흑인들은 맞아 죽기도 하고 이동 중에 죽는 일이 다반사일 수 밖에 없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은 흑인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을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도 노예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들 나라 국민들 중 상당수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흑인들은 게으르고 무식하기에 가난하게 살아가는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그렇게 조장하고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여전히 결코 공정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지 못하고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세계를 시끄럽게 하자 한 식당에서 ‘아프리카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서슴없이 붙였다. 그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인을 채용할 때 ‘백인’만 가능하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나라도 역시 한국이다. 또한 학원 관계자들에게 아이들이 흑인 교사를 무서워한다고 압박을 가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포적정과 석굴암을 가지고 일본의 식민 사관을 이야기 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하던 시절 자신들의 치적을 쌓고 한국을 무시하기 위해서 과장하고 축소하는 방법을 통해서 포석정을 마치 대단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석굴암을 발견한 것을 가지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모든 것을 합리화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순신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남다르다.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라는점 때문이 아님을 지적한다. 이순신 장군을 이용한 박정희식 ‘프로파간다’ 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박정희는 군사 쿠테타를 통한 정권을 잡고 헌법을 유린하면서 독재를 감행 하였지만 그때마다 이순신 장군을 볼모로 잡고 합리화를 한다. 현재 나라가 어렵다->역경을 헤쳐 나가야 한다->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마치 독재가 없었으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다 는 논리다. 이 논리는 일본의 식민 사관과 닮았다. 식민 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너희 조선은 발전하지 못했다 라는 논리와 닮아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년전 국무총리 내정자로 지정된 문창극 지명자의 발언이 떠올랐다. 한 교회 집회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망언을 통해 결국은 국무총리에 낙마했는데 이것은 비단 개인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사회가 한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때문이다.
2000년대 방영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던 ‘뉴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이 있었다. 그 전에는 ‘남자 셋 여자 셋’이라는 시트콤도 있었다. 이 시트콤은 불과 20년도 전에 방영되었지만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많은 이들이 회자하고 재방송을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때에는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다시 보면 불편한 장면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남녀가 한 방에 같이 앉아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오토바이를 운전하면서 헬멧이나,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모습, 술을 많이 마시고 주사를 부리고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하는 모습은 지금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모습이다.
20년전 담배와 지금의 담배는 똑같이 몸에 유해 하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의 변화가 있는 것뿐이다. 현실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흡연자들의 숫자도 감소 하고 있다. 비슷한 예로 간통죄를 들 수 있다. 2015년 간통죄는 폐지 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성생활을 간섭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하지만 2001년 1(위헌):8(합헌) 2008년 5:4 2015년 7:2 으로 불과 14년만에 전 국민의 인식의 수준이 바뀐 것이다. 의식이 흐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의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수와 진보라는 타이틀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같은 공간에 살지만 다른 문화를 접하고 자랄 수 밖에 없다.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서로를 미개하거나 무례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마법의 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애국이고 둘째는 북한이다. 노인들 중에는 ‘빨치산’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빨치산은 불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나온 말로 ‘레지스탕스’ ‘정규군이 아닌 유격대’ 정도의 뜻을 지닌 만국 공영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 중에는 이 단어가 6.25전쟁 당시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서 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활동한 ‘당시의 북한 군인들’을 지칭하는 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65세이상 고령자 고용률 남성이 40%, 여성이 20% OECD 회원국 평균 남성 17%, 여성이 8%이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유효 은퇴 연령’이 한국 남성은 71세(멕시코 72세)로 OECD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성의 은퇴 연령은 69,9세(칠레 70.4세)로 OECD 2위이다. 노인 빈곤율(66~75세)는 42%로 압도적 1위, 7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60%에 달한다. OECD평균 12~13% 정도이다.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 10만명당 64명 OECD 1위이다. OECD평균 20명이라고 하니 가히 압도적으로 많다.
경제를 종교로 여기면서 ‘성장’이라는 단어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되어 버렸고 ‘분배’라는 말만 나오면 ‘사회주의’를 연결 시켜 북한을 끄집어 내기에 토론과 대화는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기업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제대로 노동자들에게 분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경제를 강조하다 보니 경제가 발전은 했는데, 발전의 혜택은 일부만 누리고 있는 셈이다.
경제지상주의가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세월호 사건이다. 규정을 지키지 않고 화물을 과적했다. 최대 적재량이 1077톤인데 실제 2141톤을 적재했고 자동차는 88대가 최대치인데 실제 124대를 실었다. 수명이 다 된 중고 선박을 구입하여 객실을 증축해서 600명이었던 승선 규모를 900명으로 늘렸다. 배에 탔던 15명의 직원 중 비정규직은 9명에 달했다. 이러한 참사를 통해 국민들의 분노가 정부와 여당에 불리한 형국이 형성되자 보수 언론은 마법의 단어를 꺼내 든다. 사람들의 세월호로 인한 애도로 내수가 얼어 붙어 경기 침체가 되면 한국 경제가 좌초될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통령도 마법의 단어인 경제를 사용하면서 국회 연설을 통해 세월호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위기를 강조했다.
우리는 온갖 매스컴에서 나온 통계의 수치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신뢰성 있고 공정하게 조사를 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는 통계의 함정이 숨어 있다. 2014년 여성 공무원은 전체의 49%에 달한다. 이 수치만 보면 여성이 공무원의 절반을 차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안을 들여다 보면 1~3급 고위직 여성 공무원 비율은 4.5%, 10대 그룹에서 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할 확률이 0.07%, 공기업인 경우 0.002%에 불과 하다. 즉, 유리천장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과거보다 증가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실질적인 ‘남녀평등’ 으로는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자는 말미에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변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독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대안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자체가 상식적으로 변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정치가 사회문제나 갈등을 해결하고 시민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살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비판적 시민이 많아야 가능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와 더불어 끊임없는 요구와 목소리만이 우리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우리 후대에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사회학에 관심이 있거나 현실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읽으면 좋을 책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