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도로 간 익령군 인천 해양 설화 이야기 그림책
권문희 지음 / 한림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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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익령군은 왜 개경에서 영흥도로 갔을까?

 

 

이 책은 영흥도 이름의 의미를 재미있는 글과 그림으로 알려준다. 많은 사람들이 관광지로 찾는 대부도옆엔 선재도그 옆에는 영흥도가 위치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섬이 었지만 2001년 영흥대교가 생기면서 이젠 섬 아닌 섬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영흥도’(靈興島)는 왜 영흥도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영흥도로 간 익령군>을 통해 한 번 알아보자.

 

 

 

고려 말에 성은 '', 이름은 ''라는 사람이 개경에 살았다. '왕기'는 왕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왕기를 '익령군'이라 불렀다. 왕기의 커다란 기와집은 궁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왕기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송악산과 궁궐이 보이는 높은 마루에서 바둑을 두곤 했다. 고려는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 불교를 믿는 나라였기 때문에 개경에는 절들이 아주 많았다. 불심이 깊은 왕기와 가족은 자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주를 했다.

 

 

당시 고려 왕조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갈수록 나빠졌다. 힘을 가진 자들은 마음대로 왕을 몰아내고 힘없는 왕족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왕기의 근심은 깊어졌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세력은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들였다. 멀리 끌려간 줄 알았던 왕씨들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왕기는 가족을 데리고 개경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친구와 그 가족들까지 함께 몰래 도성을 떠나기로 한다. 남쪽 섬은 육지와도 가깝고 논밭이 많아 끼니 걱정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천신만고 끝에 왕기 일행이 도착한 섬에는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며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왕기 일행이 풍랑을 만나 떠밀려 온 장사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왕기는 섬사람들에게 왕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성을 바꾸고 함께 온 일행과 조용히 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섬사람들도 왕기 일행을 불쌍히 여겨 많은 도움을 줬다. 왕기와 일행은 힘을 합쳐 초가삼간을 짓고 버려진 땅을 일구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 서툴기 짝이 없었고 몸은 고되었다. 왕기가 섬으로 들어온 지 3년 후 끝내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세워졌다. 왕씨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고 그 소식은 왕기에게도 전해졌다. 왕기는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살다가 끝내 개경에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기가 세상을 떠난 뒤 왕기의 후손들은 목동이 되어

말을 기리는 일을 하며 대대로 섬에서 살았다. 익령군이 살았던 섬은 후에 익령군의 '()'자를 따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 익령군은 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지만 후손들은 영흥도를 고향으로 섬기며 오래오래 살았다. 지금도 영흥도에 가면 익령군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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