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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티파니 와트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Schadenfreude
이 책은 고소하고 즐겁지만 겉으로 드러내긴 어려운 내 안의 나쁜 마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에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주지는 않고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가면 진정으로 기뻐해주고 같이 슬퍼해주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나만큼 펑펑 우는 친구가 있는가? 결혼식장에서 나만큼 기뻐 춤 추는 친구가 있는가? 단 한 명만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일 읽으면서 tvN <코미디빅리그>라는 코미디 프로그램 중 ‘갑과 을’이라는 코너가 생각났다. 세상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코너였는데 첫 방송 이후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음식점 사장님과 에어컨 수리 기사님’편이 내 기억으론 아마 첫 편이었다. 음식점 사장님은 고장 난 에어컨에 불만 가득한 상태로 A/S신청을 한다. 두 명의 기사님이 헐레벌떡 가게에 오자 다짜고짜 ‘왜 이리 늦었냐’ ‘손님은 왕 아니야?’ ‘이게 죄송한 표정이야?’ 등 반말과 함께 말도 안 되는 끊임없는 진상 상황을 연출한다. 이 코너의 백미는 에어컨 수리 기사들이 방금 자신을 홀대한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하면서 당한 만큼 똑같이 되갚아줌으로써 통쾌한 웃음을 유발한다. 과연 어느 부위가 사람들을 파안대소(破顔大笑) 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이 코너는 ‘샤덴프로이데’를 잘 이용한 듯 하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독일어는 ‘샤덴 Schaden’은 피해나 손상을, ‘프로이데 freude’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한다. 즉, ‘피해를 즐긴다’라는 뜻이다. 샤덴프로이데의 미소는 기쁨의 미소와 구분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자신의 성공보다는 적의 실패에 더 많이 웃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초래하지 않은 남의 불행을 우연히 발견하고 재미있게 구경할 때 느끼는 기회주의적인 기쁨이다.
실수 동영상을 사람들이 즐겨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출 된다. 때론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웃고 즐긴다. 아마 이런 실수 동영상은 샤덴프로이데 시대의 문화적 정점이라 할 수 있다. 2011년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심리학자들은 웃음과 통증 저항력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오직 슬랩스틱을 볼 때만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는다는 것이었다. 피실험자들에게 시트콤, 스탠드업 코미디, 만화 등에서 따온 짦은 장면들을 연이어 보여주었다. 그중 진짜 포복절도를 유발한 것은 유치한 사고뭉치 미스터 빈이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통증 감도를 10%까지 줄여준다고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있으면 우리 자신의 고통이 줄어들지 몰라도, 많은 문화권에서는 무절제한 폭소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연민의 미덕이 부족해 보인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일부 문화권에서 폭소는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웃음이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샤덴프로이데가 아주 고약한 감정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남의 육체적 고통과 서툰 행동을 보고 우월감을 느낄수록 더 잔인한 구경거리를 찾고픈 유혹이 일어날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면 대개 희생이 따른다. 관계가 어색해질 수도 있고, 더 나쁘게는 육체적인 보복까지 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통쾌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실수 동영상과 더불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융단 폭격처럼 가해지는 도덕적 훈계는 우리가 거실 소파에 편하게 앉아 악의적인 보복을 꿈꾸는 샤덴프로이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규칙을 어긴 자가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며 표출하는 샤덴프로이데는 선의의 힘이 되어 공적 담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하지만 군중 재판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변질하면 파국을 초래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거기에 빠져버린다.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에는 거북함이 상당히 잠재되어 있다. 비도덕적인 언행에 쉽게 발끈하게 되고 작은 정보 하나에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인터넷상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예전에는 타인의 불행을 대놓고 기뻐하거나 즐거워 하는 이를 경멸하거나 못마땅한 태도로 여겼지만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되고 있다. 우려할만한 상황과 조건은 여전히 존재 하지만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심리 자체를 죄악시 하거나 외면 할 필요는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렇기에 받아들여지고 인정 해야 한다고 한다. 기준과 잣대, 사회적 용인의 수준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을 통해 우리의 다양한 내면을 알 수 있는 책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