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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의 탄생
이 책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택배기사가 세상과 부딪히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법을 그리고 있다.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우선, 하드보일드[hard-boiled]은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이다. 하드보일드는
장르(genre)라기보다는 스타일(style)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주제를 냉철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진다.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
텍스트에서 비정하고 건조한 세계의 일면을 미니멀한 스타일로 담아내는 제반 수법들을 지칭한다. 여기서 ‘비정함’의 속뜻은 캐릭터나 사건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표현이 건조하고 냉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는 예술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건조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라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과거에 대해서도 단편적으로 몇 가지만 얼핏 알려준다. 작가는 주인공의 경력, 과거를 언급하지 않은 채 현재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주인공은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말투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들의 대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출한다.
무일푼으로 서울 강남버스터미널에서 구직란을 보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몸을 쓰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택배 기사 직업을 하기로 한다. 몸은 고되었지만 사람들과의 접촉은 최소한 한 상태로 일을 하기에 만족하면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익숙해지면 여유가 생기는 법, 매일
같은 코스를 돌아다니다 보니 점점 눈에 익은 사람들이 보이고 말을 걸기 시작하는 사람이 생긴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 거리를 방황하는 남자, 경제 철학을 알려주겠다는 할아버지, 게이 바를 운영하는 게이, 또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점차 친분을 쌓게 된다. 주인공이 원했던
삶은 아니지만 거절을 못하는 성격 때문에 점차 관계를 맺게 되고 그로 인해 오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책은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기도 과거를 통해 무언가를 내포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가 어떤 식으로 버티는지 처절하게 알려주는 듯 하다. 주인공의 과거는 책의 맨 마지막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마치 영화 <아저씨>와 넷플릭스 미드 <퍼니셔>의 주인공들의 과거를 짬뽕 시켜놓은 듯 하다.
화려한 액션도 숨박히는 추격전도 복잡한 두뇌 싸움도 벌어지지 않는다. 터미널이라고
하는 택배회사 집화장에서 까데기를 하며 오늘 돌릴 택배를 생각하고 다른 구역 택배 기사가 일이 생기면 서로 십시일반 도와주는 모습과 일이 일찍
마치는 날엔 술을 마시면서 오늘의 고된 일을 잊으려고 하다가 결국은 술판에서 개싸움으로 끝나는 모습을 반복한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몸을 쓰는 직업을 할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하게 여기는 편견에 맞서 주인공은
화려한 화술로 비상식적인 고객들에게 당당하게 외친다. 또한 같은 택배 기사 동료로 알았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면서 서울대를 나왔지만 학생 운동에 가담했던 과거를 숨기기 위해 동대문 시장에서 지게꾼으로 일한 아버지 밑에서 역시 서울대를 나와
성공가도를 달리다 친구의 배신으로 배임횡령으로 교도소에 다녀와 택배 일을 한다고 밝히는 장면은 인생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밑바닥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책의 일부 내용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아마도 자전적 느낌이 많이 묻어 나올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분명
저자는 주인공처럼 택배 관련 일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었을 것이다. 주인공과의
차이라면 주인공은 내일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없지만 저자는 수많은 소설들과 영화, 음악을 들으면서 견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전체 직장인 중 1/3은 월 200만원 미만의 급여를 받는 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전히 월 200이라는 숫자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유튜브, SNS를 보면 억,억하는 소리는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중년, 노년들도
여전히 많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 할 듯 하다. 어느 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와 대화 말미 주인공은 힘내라는
말 대신 죽지 말라는 말을 한다. 지금 이 시간도, 순간에도
많은 이들에게 힘내라는 말보다는 죽지 말라는 말이 더 절실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술술
잘 읽혔지만 책을 다 덮고 나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은 오랫동안 기억될 듯 하다.
<인상 깊은 구절>
내가 생각하는 서비스업의 정의는 간단하다. 나는 고객에게 불친절하지
않을 의무가 있고(친절까지는 의무가 아니다) 고객은 나에게
불친절할 권리가 없다(내가 먼저 불친절하지 않는 이상). 그뿐이다. 물론 일반 직장이라면 직장에 다니는 것조차 위태롭겠지만 다행히 택배는 그렇지 않다. 욕설을 하지 않는 이상, 물건의 분실이나 파손이 아닌 이상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활용 하고 살아야 한다. 난 노동을 팔러 온 것이지 감정을 팔러 온 것이 아니니까. 굳이
팔라고 하면 못 팔 것도 없겠지만, 그럼 자본주의의 윤리에 맞게 대가를 주든가. 하지만 감정노동에 대한 대가 따위는 없다. 이런 걸 착취라 하고, 눈 뜨고 당하고 있는 걸 바보라고 한다. 가난하게는 살 순 있어도
바보로 사는 건 싫다.(75~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