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조선 - 우리가 몰랐던 조선인들의 성 이야기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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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조선인들의 성 이야기

이 책은 춘화와 음담패설, 스캔들로 엿본 조선의 은밀한 성생활을 알 수 있다. <음란서생>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후궁: 제왕의 첩> <방자전> <간신>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19금 영화라는 것과 조선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19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조합으로 보이지만 첩, 궁녀, 기생을 비롯한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여기는 문화가 버젓이 있었고 춘화를 비롯한 육담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조선시대에도 지금 못지 않게 성적인 욕망이 있었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의 저자이자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 박영규가 신작인 <에로틱 조선>을 통해 그간 잘 몰랐던 조선의 성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에로틱, 에로티시즘, 섹슈얼리티&스캔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간통죄가 없어졌던 한국 사회는 다른 나라보다 성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도 청소년들의 연애에 대해 특히 성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물며 유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살고 있는 조선에는 성을 단순히 생식의 수단으로만 여겨야 했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 성욕이 단순한 대를 잇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되어서는 욕망이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키워드를 먼저 살펴보자. 첫 번째, 에로틱 심벌(erotic symbol)은 성적 본능을 자극하고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존재를 말한다. 두 번째, 에로티시즘(eroticism)이란 정욕을 부추기는 사상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적인 성행위뿐 아니라 성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유무형의 것들이 에로티시즘의 범주에 포함된다. 에로티시즘은 영상문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주로 그림과 글로 구현되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으로 춘화와 육담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인간의 성욕과 성행위, 이와 관련된 사회제도와 규범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성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 감정, 가치관은 물론이고 법령과 도덕률, 풍습, 행동 양식이 반영된 총체적인 성 문화를 말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폐쇄적인 사회에서 가장 자유분방했던 존재는 힘 있고 권력 있는 남성이었다. 이는 남녀차별이 극심할수록 권력을 가진 소수의 남성들이 누리는 성적 행위의 폭이 넓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신분 격차가 크고 남겨 간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힘 있는 남성은 여성을 상대로 마음껏 성적 유희를 즐겼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은 성적 희생물로 전락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간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남녀가 혼인하는 것조차 법도에 어긋난다고 여겨, 미리 만난 사실이 발각되면 혼인이 무산되거나 이혼해야만 했다. 부부의 연을 맺어도 법도에서 자유롭지 않았기에 서로 음탕하게 희롱하거나 성애를 즐기는 데 한계가 있었다. 부부의 성생활은 자손을 잇는 방편으로 인식 되었다. 그렇기에 기생, 궁녀, 의녀, 첩이 존재 할 수 밖에 없었다.

책에서 대표적인 기생인 장녹수’, ‘황진이’, ‘어우동등을 비롯해 대장금과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의녀를 첩으로 삼는 것을 무척 선호했다. 의녀는 기본적으로 건강을 잘 돌보는 데다 침도 놓고 안마도 잘했으며 한문도 알고 머리도 좋았다. 미모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였다. 인물이 출중한 의녀는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높았다. 의녀는 양반들에게는 첩 선호도 1순위였다. 의녀들은 어떻게든 천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는데, 유일한 방법이 바로 양반의 첩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의녀 중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은 중종 대의 대장금 이다. 대장금은 의녀로는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중종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건강을 맡겼을 정도로 신뢰한 의원이었다.

조선시대에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내치고 첩을 두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담 서경덕, 율곡 이이, 회재 이언적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밀하게는 후궁도 첩이었으니, 조선시대에 첩을 가장 많이 거느린 사람은 단연 임금이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일수록 후궁을 많이 두었다. 세종은 무려 12명의 첩을 거느렸다.

첩을 두는 본래 목적은 후손을 잇기 위함이다.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서자라도 얻어 대를 잇고자 한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효행이었다.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것을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하지만 조선의 모든 남성이 그런 이유로 첩을 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를 잇기 위해 첩을 둔 남성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일부일처제였던 조선 사회에서 사내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과 합법적으로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첩 제도였기 때문이다.

에로틱 아트의 일종은 춘화는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묘사가 노골적이고 선정적이라 성욕을 촉진하는 용도로 쓰였다. 김홍도의 <운우도첩>에 실린 작품 중 가장 선정적이면서도 당시 사람들의 성적 열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은 혼교를 나타낸다. 두 여인과 한 사내가 정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또한 <운우도첩>중에서 야외에서 벌어지는 정사를 묘사한 작품이 여러 점 있다. 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가 정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중년 남자는 바로 승려이다. 또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젊은 남자는 승려를 따라온 젊은 승려이다.

<운우도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노인의 씁쓸한 욕망을 담은 그림이다. 트레머리를 한 초로의 여인과 머리가 완전히 벗겨지고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 등장한다. 나체로 앉은 남자는 왼손으로 축 늘어진 음경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마루를 짚고 있다. 남자의 다리는 여인의 치마 밑에 들어가 있다. 초로의 여인은 치마와 저고리를 모두 입고 앉아 무릎을 세운 채 다리를 벌리고 오른손으로 치마를 들추어 음부만 내보이고 있다.

신윤복의 <건곤일회첩>에 실린 작품 중에서 한 사내가 방에서 정사를 나누고 있는데 다른 젊은 여인이 훔쳐 보는 것도 있다. 또한 승려와 부인네가 정사를 벌이기 직전의 전희 장면을 묘사한다. 여인은 누워 있는 승려의 음경을 오른손으로 애무하고 있다. 그녀가 손에 쥔 승려의 음경은 터질 듯이 팽창했고, 승려의 눈빛은 금세라도 그녀를 탐할 듯 하다. 승려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 또한 욕정에 젖어 있다. 여인은 오른 손으로는 승려의 음경을 애무 하고 왼손은 자신의 고쟁이 속에 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간통’, ‘강간’, ‘근친상간’, ‘동성애가 존재 하였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욕망인 성욕을 온전히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하게 조선시대에 있었던 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쓴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절대적 약자였던 여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들이 생존을 위해서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 양반을 비롯한 기득권층에 몸을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성 문화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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